미래 작가 표절이 가능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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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6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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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상표절/피에르 바야르 지음·백선희 옮김/196쪽·9800원·여름언덕

아르헨티나 작가 호르헤 보르헤스는 ‘주홍글씨’로 잘 알려진 19세기 초 미국 작가 너대니얼 호손의 단편 상당수가 카프카적 특색을 지니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수수께끼 처럼 부조리한 상황,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는 유예의 지속 같은 카프카적 요소들이 호손의 단편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르헤스는 “호손이 발표한 단편소설 속의 기이한 상황이 카프카가 쓴 단편에서 느껴지는 것과 동일한 맛을 낸다고 해도, 카프카적 맛은 카프카에 의해 창조됐음을 망각해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카프카가 존재했기에 우리가 호손의 텍스트를 ‘카프카적’으로 독해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예상표절’이란 다소 황당한 개념을 펼쳐 보이는 이 책의 논리는 “위대한 작가는 선구자들을 창조한다”는 보르헤스의 지적과 맥이 닿아 있다. 이 책의 분석 대상은 시대가 다른데도 불구하고 놀라울 만큼 유사점을 보이는 몇몇 작품들이다. 하지만 저자는 보르헤스의 논리에서 몇 발 더 나아가 이전 작가들이 다음 세대에 출현할 미래 작가들의 작품을 의도적으로 ‘표절’했다고 주장한다. 파리8대학 문학 교수인 저자는 ‘예상표절’이란 기발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연대기적 예술사의 허점을 파고든다.

우선 몇 가지 예상표절의 사례를 보자. 계몽주의 시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인기 작가 볼테르(1694∼1778)의 콩트 ‘자디그’에는 모래 위의 흔적, 나뭇가지가 부러진 정도를 보고 개나 말의 키를 추론해 내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것은 사소한 흔적에서 사실의 연결고리를 재구성해 결론을 끌어내는 코넌 도일(1859∼1930) 추리소설의 전범이다. 볼테르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추리소설 기법을 작품 속에 끌어들인 적이 없으며 이 에피소드는 작품 전체적인 맥락에서 완전히 따로 논다. 저자는 이런 증거들을 바탕으로 “아무리 선의를 가지고 보더라도 여기서 볼테르가 추리소설의 역사상 가장 유명한 탐정인 셜록 홈스의 모험담을 예상표절했다는 사실을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모파상(1850∼1893)과 마르셀 프루스트(1871∼1922)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모파상의 ‘죽음처럼 강한’에는 “과거의 삶이 끓어 넘치듯 떠오르는 일”을 겪고 있는 주인공의 심경 묘사가 등장한다. 이 부분은 저자와 연대기를 가리고 본다면 시간, 기억에 관한 성찰을 문학적 주요 테마로 삼는 프루스트의 것과 전혀 구분되지 않는다.

이 지점이 되면 정말 궁금해진다. 어떻게 과거 작가가 미래 작가를 표절하는 게 가능한가. 저자는 예상표절이란 개념이 일종의 ‘회고적 영향’ 때문에 생긴 착시현상일 수 있음을 일부 인정한다. 즉, 프루스트가 있었기에 모파상을 프루스트적으로 읽는 게 가능하다면, 그것은 독법의 차이일 뿐 표절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회고적 영향에 과도한 자리를 부여하면 예상표절이란 개념 자체가 무색해질 있다. 때문에 저자는 실제로 미래의 아이디어를 도용하는 행위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프리드리히 니체, 폴 발레리의 주요 개념을 바탕으로 차례대로 논증해 간다. 니체가 영원회귀를 통해 주장한 것처럼 시간이 순환적이며, 발레리의 인식처럼 문학사가 탈연대기적인 정신의 역사이고, 보르헤스가 말했듯 모든 작품이 이미 쓰인 작품이라면, 예상표절이 불가능할 이유가 없다는 방식으로.

이렇게 예상표절을 인정하고 나면, 문학사를 전부 다시 써야 한다. 소포클레스가 프로이트를 표절하고 프라 안젤리코가 잭슨 폴록을 표절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예술사의 지나치게 경직된 인식을 넘어선 탈연대기적 작업은 좀 더 풍요로운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저자의 이 같은 논증이 기대했던 것만큼 결정적이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예상표절’이란 독특한 개념을 통해 기존 예술사에 대한 발상 전환의 계기를 제공해 준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원제 ‘Le Plagiat par Anticipation’.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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