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90주년]“윤동주, 황순원과 동아일보 읽으며 나라 걱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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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4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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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 교수의 동아일보 인연


《1928년 평양에서 15리 떨어진 작은 마을에는 8세 소년이 살고 있었다. 소년은 매주 동장 아저씨 집으로 들어오는 동아일보를 손꼽아 기다렸다. 집배원이 신문을 들고 오는 날이면 동네 사람들은 동장 집에 모여 동장이 큰 소리로 읽어주는 신문 기사에 귀를 기울였다. 그때는 신문이 워낙 귀했던 터라 신문을 온 동네 사람이 돌려 읽고 작은 기사 하나에도 웃음보가 터지곤 했다. 옆집 살던 아주머니는 “나는 동아일보에 이름을 실어준다면 자살도 하겠다”고 장난스레 말했다.》

82년이 흘러 소년은 어느덧 아흔 살이 됐다. 소년이 태어난 해에 창간한 동아일보도 90년 역사를 쌓았다. 평생 동아일보와 특별한 인연을 이어 온 김형석 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90) 이야기다.

○ 윤동주, 황순원과 함께 읽던 신문



“동주(윤동주 시인)랑 순원 선배(황순원 작가)랑 같이 동아일보 읽으면서 학교 걱정, 나라 걱정했습니다.” 12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광화문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난 김 교수는 “동아일보는 일제강점기, 6·25전쟁, 유신정권 등 힘겨운 시절에도 늘 정확한 뉴스를 전달했던 언론”이라고 회상했다.

그는 1934년 평양 숭실중학교(현재 서울 은평구 신사2동 소재)에 진학했다. 숭실전문학교(현 숭실대), 숭의여중과 더불어 민족주의 정신이 강해 ‘평양3숭’으로 불리던 학교다.

김 교수가 중학생이던 시절 일제는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학교를 나날이 압박했다. “당시 분위기가 워낙 험악하다 보니 학교 선생님들도 쉬쉬하며 입을 닫았습니다. 동주와 나는 매일 동아일보에 실린 학교 소식을 갖고 얘기를 나누며 학교 걱정을 했었죠.”

1936년 학교를 세운 미국인 선교사들마저 강제 추방을 당하자 김 교수와 윤 시인은 오랜 고민 끝에 자퇴를 선택했다. 학교 수업을 포기하더라도 신사참배는 하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윤 시인은 만주로 떠났고, 김 교수는 자전거로 한 시간 반을 달려 매일 평양구립도서관을 찾았다. 도서관에서 책과 동아일보를 읽는 게 당시 자퇴생이던 김 교수의 유일한 낙이자 사회와의 소통 방식이었다.

○“우리 사회 가치관 설정하는 언론 기대”

성인이 된 김 교수는 일본 조치(上智)대 철학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에서도 김 교수는 동아일보를 보는 게 낙이었다. “그 당시 신문 읽는 법이 따로 있었어요. 큰 제목은 안 보고 작은 제목이랑 기사 행간에 숨어있는 의미를 찾아내는 거지. 거기엔 동아일보가 진짜 전달하고 싶었던 항일정신이 녹아있었거든요.”

대학 졸업 후 귀국한 김 교수는 첫 직장으로 중앙중을 택했다. 1954년까지 7년간 교사로 근무하면서 30대 초반 나이에 교감직도 맡았다.

“한참 아랫사람인 내게도 항상 깍듯하게 대해주던 분”으로 동아일보 및 중앙중 설립자인 인촌 김성수 선생을 회상한 김 교수는 인촌 정신을 세 가지로 정리했다. “인촌의 항일, 반공, 민주화 정신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 동아일보의 뼈대 역할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인촌 선생의 타계 이후 연세대로 이직한 김 교수는 동아일보 광고탄압 사태 당시 박두진 시인 및 동료 교수들과 함께 격려 광고를 내기도 했다. 당시 광고 문구는 ‘진실이 이긴다’ ‘언론은 정치보다 귀하다’였다고 김 교수는 회고했다.

평생 동아일보와 특별한 인연을 이어 왔던 김 교수는 동아일보의 미래를 위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우리 사회의 가치관을 발견해줄 수 있는 언론이 돼 주세요. 우리 민족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큰 가치관을 만들어 주시길 바랍니다.”

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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