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책임 면한 日王, 과거사 반성 회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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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2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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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명세씨, 日-獨 비교논문

대신 日군부가 책임 떠안아
기성 정치-관료체제 온존

獨선 반나치세력 등 나서
戰後정부 보수화 막아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왼쪽)이 뒷짐을 진 채 히로히토 일왕과 서 있는 이 사진은 패전국 일본의 처지를 상징하고 있는 듯하다. 미 군정은 일본 군부에만 전쟁 책임을 물음으로써 일왕에게 면죄부를 줬다.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왼쪽)이 뒷짐을 진 채 히로히토 일왕과 서 있는 이 사진은 패전국 일본의 처지를 상징하고 있는 듯하다. 미 군정은 일본 군부에만 전쟁 책임을 물음으로써 일왕에게 면죄부를 줬다.
1985년, 패전 40주년 행사가 열린 서독과 일본에서는 상반된 풍경이 펼쳐졌다.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당시 서독 대통령은 “과거에 눈을 감는 자는 현재에도 맹목이 된다”며 전쟁 책임에 대해 깊이 사죄했다.

그러나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당시 일본 총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고 국가 권위 회복과 정치대국, 군사대국으로의 변신을 추구하는 등 ‘전후(戰後) 정치 종식’을 선언했다.

이 같은 일본과 독일의 과거사 인식 차이는 왜 발생한 것일까. 당시 일본 정치체제와 미국의 전후처리 정책 등을 통해 분석한 논문이 나왔다. ‘세종정책연구’ 2010년 제6권 1호에 실린 강명세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의 ‘일본은 왜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는가?’.

강 위원은 우선 “일본 과거사 반성 문제의 핵심은 히로히토(裕仁) 일왕에게 부여된 면죄부”라고 말했다. 유엔 산하 런던 전범위원회는 1945년 항복선언 당시 일왕을 전범 명단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미국은 이에 대한 결정을 유보하다 결국 효율적인 점령정책 수행을 위해 도쿄전범재판 피고인 명단에 일왕의 이름을 넣지 않았다. 피고인 명단에 오른 약 2만 명을 제외한 나머지 일본인도 이때 면죄부를 얻었다. 강 위원은 “천황제의 유지는 일본 국가적 전통의 보전을 의미한다”며 “1990년대 부상한 (일본의) 민족주의는 천황제를 일본의 전통으로 부활시켜 사회통합을 실현할 것을 강조해왔다”고 지적했다.

전쟁의 책임은 일본 정부가 아니라 군부에 돌아갔다.

일본의 한 퇴역군인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고 일장기를 든 채 나오고 있다. A급 전범들의 위패를 보관한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곳이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일본의 한 퇴역군인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고 일장기를 든 채 나오고 있다. A급 전범들의 위패를 보관한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곳이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강 위원은 “1949년 이후 냉전이 본격화하면서 미국은 더글라스 맥아더 사령관에게 (일본) 개혁의 방향을 보수파 제거에서 좌파 제거로 이동하도록 압력을 넣었다”고 설명했다. 대신 일본의 관료와 정치 엘리트는 그대로 남아 현재까지 그 세력을 이어오고 있다. 나치 정부 전체가 전쟁 책임을 지고 정부 자체가 교체됐던 독일과 다른 점이다. 미국은 독일에서 18세 이상 성인에게 전쟁 중 행적을 묻는 설문조사를 실시할 정도로 철저한 탈나치화 정책을 펼쳤지만 일본에서 이 같은 조치가 이뤄진 적은 없다. 미국이 전후 일본 내에서 독점적 지위를 유지한 것도 독일과의 차이점이다. 독일은 영국, 소련, 미국 등 여러 국가의 이해관계가 작용하면서 분단이라는 대가를 치렀다. 일본의 경우 소련을 의식한 미국이 상대적으로 관대한 정책을 펼치며 일본 정치체제의 개혁보다는 경제 지원에 초점을 맞췄다. 독일이 연방하원 선거를 1949년에야 실시할 수 있었던 것에 비해 일본은 하원인 중의원 선거가 1946년에 실시된 게 단적인 증거다.

강 위원은 이외에도 반나치 세력이나 나치 체제에 비협조적이었던 종교계 등이 전후 정치세력화하며 정부의 보수화를 막은 독일과 달리 일본은 이 같은 기능을 하는 집단이 없었다는 점도 양국의 과거사 인식에 차이를 낳은 배경으로 지적했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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