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극장’ 지킴이 허리우드극장 김은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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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2월 9일 18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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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오늘 상영하는 영화는 외화 ‘셜록홈즈’고요, 다음 주부터는 강수연 씨가 주연으로 나오는 ‘씨받이’를 틀어드립니다.”

지난 5일 서울 낙원동 허리우드 극장. 김은주(여. 36) 대표는 스크린 한가운데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영화 안내를 시작한다. 객석의 자리를 메운 관객들의 머리카락은 모두 희끗희끗하다. 김 대표의 안내가 끝나자 박수가 쏟아진다. 그리고 70세쯤 돼 보이는 한 노인이 김 대표에게 질문을 던진다. “왜 내가 젊을 때 봤던 그 뭐더라? 신성일 나오는 거 있잖아. 그건 언제 볼 수 있는 거야?” 이렇게 질문과 답변이 수차례 오고가길 30분 째. 상영 예정시간 40분이 훌쩍 지나서야 영화가 시작됐다.

국내 최초의 ‘실버영화관’인 허리우드 극장이 지난 달 29일 개관 1주년을 맞았다. 이곳은 한때 서울 시내 주요 개봉관 중 한 곳으로 꼽히던 허리우드극장 3개관 중 한 곳을 임대해 어르신 전용 극장으로 탈바꿈했다. 주로 국내외 고전영화를 상영한다. 상영될 영화는 이곳을 찾는 어르신들에 의해 결정된다. 이들이 가장 보고 싶은 영화들을 김 대표가 통계를 낸 후 순차적으로 영화를 보여준다. 이곳은 만 57세 이상은 관람료가 2000원이다. 표 한 장으로 마지막 회 차인 4회 차까지 관람할 수 있다. 주변 음식점이나 생필품 가게에 표를 보여주면 50%까지 할인을 받을 수 있다.

국내 최연소 영화관 주인인 김은주 대표는 부친과 함께 1969년에 지어진 서울 서대문 드림시네마와 낙원동 허리우드극장을 운영하고 있다. 김 씨는 영화 마케팅 일을 10년 넘게 했다. 그러던 중 은퇴를 준비하던 아버지를 도와 2005년 드림시네마를 인수하며 첫 영화관 운영을 맡게 됐다. 대표로서 그의 첫 시도는 고전영화 상영이었다. 어릴 적부터 고전영화 매니어였던 그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던 영화 ‘더티댄싱’을 수입해 상영했다. ‘더티댄싱’ 외에도 ‘영웅본색’, ‘미션’을 연달아 상영해 관객들을 극장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이곳이 재개발로 문을 닫을 처지에 놓여 2008년 4월 지인의 제안으로 허리우드극장을 인수했다. 드림시네마는 재계발이 미뤄졌다.

허리우드극장으로 자리를 옮긴 김 대표는 탑골공원과 종묘 등 영화관의 주변 환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문화적으로 접근하기 힘든 어르신들을 보면서 세대간, 문화간의 소통을 느끼게 해드리고 싶었다. 나와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 같았다”며 “막연하게 생각한 게 지금까지 오게 됐다”고 개관 배경과 함께 1주년에 대한 소감을 밝혔다.

실버영화관은 한 달 관객 수가 4000~6000명을 유지하고 있다. 지난해 5만 명을 넘으며 관객은 점차 늘고 있는 추세다. 종로구 일대의 터줏대감은 물론이고 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는 수도권 등에서도 많이 찾아온다. 서울 금천구에서 온 윤혜원(70) 씨는 “동네 사는 두 부부가 이 영화관에 자주 다니며 부부애를 자랑해서 알게 됐다”며 “우리 같은 노인네들이 젊은 사람들 눈치 안보고 편하게 영화 관람 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게 너무나 감사하게 생각 한다”고 말했다. 윤 씨와 함께 온 김영숙(70) 씨는 “요즘 영화는 화면이 너무 빠르게 전개 돼 머리도 아프고 이해도 잘 되지 않아서 몇 번 보고 이제는 안본다”며 “젊을 때 봤던 영화를 또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 시절이 떠올라 젊어지는 것 같다”고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김 대표는 “별다른 홍보를 하지 않았음에도 많은 분들이 찾아주셨다”며 “옛 추억을 떠올려 드리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지난 1년간 관람료 2000원으로 극장을 꾸려가기에는 너무나 벅찼다. 관람료뿐만 아니라 옛날 영화를 구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국내영화 판권은 100만~200만원이면 되지만 외국영화는 적게는 1000만원에서 5000만원까지 들었다. 그는 지난 해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을 받고, 예금.적금 등 각종 통장을 깨 극장에 쏟아 부었다. 김 대표의 어려움을 극장을 찾는 어르신들이 모를 리 없었다. 지난해 11월 1200여 명의 어르신들이 서명운동을 통해 ‘허리우드극장을 국가가 지원해 달라’는 요청서를 담당 기관에 제출했다. 서울시는 올해부터 예산 3억 원을 지원해 주기로 했다. 또 몇몇 기업에서 후원을 약속했다.

실버영화관은 모든 것이 어르신들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다. 영화 상영 시작 전 김 대표의 안내는 물론이고 영화관 입구의 중앙 계단에는 무릎이 약한 분을 위한 손잡이가 설치 돼 있다. 커피를 찾는 분들의 주머니를 생각해 커피요금은 300원을 유지하고 있다. 영화 스케줄이 적힌 종이의 글씨는 단순하고 큼직하다. 눈이 좋지 않은 분들을 위해서다. 김 대표는 영화관 로비에 DJ부스를 만들어 LP판을 틀 예정이다. ‘별들의 고향’ 같은 옛 영화 음악을 틀고, 엿치기 같은 놀이판도 준비 중이다. 기다리기 지루한 어르신들을 위한 또 하나의 배려이다.

김 대표는 ‘옛날 영화를 옛날 가격으로’라는 원칙을 세웠다. “아무리 힘들어도 절대로 가격인상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제가 노인문화공간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우며 운영해 온데에는 어르신들이 가장 큰 힘이 됐다. 지난 1년 동안 단순히 영화를 보여주는 것만이 아닌 어르신들의 진심을 보게 됐다”고 말했다.

신세기 동아닷컴 기자 shk919@donga.com

▲ 직격인터뷰 = 노인들에게 매일 박수 받는 김은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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