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어둠… 이제 바깥이 열리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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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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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 투병 끝 11년 만의 신작집 낸 최승자 시인

《최승자 시인(57)이 긴 침묵을 깨고 12일 신작 시집을 펴냈다.
‘쓸쓸해서 머나먼’(문학과 지성사).
1999년 ‘연인들’을 펴낸 후 꼭 11년 만이다.
때마침 시인은 올해 등단 30주년을 갓 넘겼다.》

“오랫동안 황폐했었던 내 詩밭…이젠 다른 풀밭으로 이사가고 싶다”
절망과 고통만 응시하던 시선 접고 홀연히 깨어나듯 변화의 의지 보여


“황홀합니다/내가 시집을 쓰고 있다는/꿈을 꾸고 있는 중입니다”(‘바가지 이야기’) 병고로 창작활동을 중단했다 11년 만에 신작 시집을 펴낸 최승자 시인. 사진 제공 민음사
“황홀합니다/내가 시집을 쓰고 있다는/꿈을 꾸고 있는 중입니다”(‘바가지 이야기’) 병고로 창작활동을 중단했다 11년 만에 신작 시집을 펴낸 최승자 시인. 사진 제공 민음사
첫 시집 ‘이 시대의 사랑’ 이후 ‘즐거운 일기’ ‘기억의 집’ ‘내 무덤, 푸르고’ 등을 펴내며 1980년대 내내 파격적이고 열정적인 시 세계를 선보였던 시인은 1990년대 후반부터 요양이 필요할 만큼 정신이 쇠약해졌다. 2006년 계간 ‘문학동네’ ‘세계의 문학’에 각각 다섯 편의 신작시를 발표했던 것 외에는 10여 년 동안 외부 활동이나 문단 교류도 없었다. 간간이 번역 작업을 한 것이 전부였다. 이를 염두에 둔 듯, 그는 신작 시집 ‘시인의 말’에서 “오랜만에 시집을 펴낸다. 오랫동안 아팠다. 이제 비로소 깨어나는 기분이다”고 짤막한 소회를 밝혔다.

현재 최 시인은 경북 포항시 포항의료원에서 요양 중이다. 2005년경부터 1주일에 두 번씩 그를 만나 외부 소식을 전해 주며 시집 출간을 도와온 외숙부 신갑식 씨는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면서도 병원에서 꼼꼼히 작품 준비를 했던 것 같다. 창작열 덕분인지 증세도 좋아졌고 많이 안정돼 가고 있다”고 근황을 전했다. 그는 “어려웠던 시기에 도움을 주셨던 분들께 (최 시인이) 창작 활동을 통해 보답하고 싶어 한다”고 덧붙였다.

“내 詩는 지금 이사 가고 있는 중이다/오랫동안 내 詩밭은 황폐했었다/너무 짙은 어둠, 너무 굳어버린 어둠/이젠 좀 느리고 하늘거리는/포오란 집으로 이사 가고 싶다/그러나 이사 갈 집이/어떤 집일런지는 나도 잘 모른다/너무 시장거리도 아니고/너무 산기슭도 아니었으면 좋겠다//아예는 다른, 다른, 다, 다른/꽃밭이 아닌 어떤 풀밭으로/이사가고 싶다”(‘내 詩는 지금 이사가고 있는 중’)

오랫동안 치유의 시간을 견뎌온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이렇듯 새로운 세계를 향한 변화의 의지를 드러낸다. 시어는 한층 간결하고 짧아졌으며 격정, 섬뜩함보단 담담하면서도 상념적인 색채가 짙어졌다. 문학평론가 박혜경 씨는 “분열된 자의식과 극심한 자기 폐쇄적 고통 속에서 내면에 자리 잡은 절망과 죽음의 심연만을 집요하게 응시하던 시인의 시선이 바깥을 향해 힘겹게 열리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평했다.

최 시인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틈틈이 쓴 원고를 문학과 지성사에 보내온 것은 지난해 8월경이었다. 교정지가 출판사와 병원을 여러 번 오갔고, 외숙부를 통해 의견을 전달해야 할 때도 있었지만 제목부터 표지색까지 시인이 직접 정했다. 그간의 힘들었던 시간에 대한 시인의 통찰은 시편 곳곳에서 다양하게 표현된다.

“한 세월이 있었다/한 사막이 있었다//그 사막 가운데서 나 혼자였었다/하늘 위로 바람이 불어가고/나는 배고팠고 슬펐다//어디선가 한 강물이 흘러갔고/(그러나 바다는 넘치지 않았고)//어디선가 한 하늘이 흘러갔고/(그러나 시간은 멈추지 않았고)//한 세월이 있었다//한 사막이 있었다”(‘한 세월이 있었다’)

치열했던 한 시절 그의 첫 시집 ‘이 시대의 사랑’(1981년)에서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서른 살은 온다”(‘삼십 세’) “내가 살아 있다는 것/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일찌기 나는’)라고 노래했던 시인. 그는 마음의 병석을 떨치고 일어나 막 세상을 둘러본 듯 이렇게 썼다.

“작년 어느 날/길거리에 버려진 신문에서/내 나이가 56세라는 것을 알고/나는 깜짝 놀랐다/나는 아파서/그냥 병(病)과 놀고 있었는데/사람들은 내 나이만 세고 있었나보다/그동안 나는 늘 사십대였다//참 우습다/내가 57세라니/나는 아직 아이처럼 팔랑거릴 수 있고/소녀처럼 포르르포르르 할 수 있는데/진짜 할머니 맹키로 흐르르흐르르 해야 한다니”(‘참 우습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 최승자 시인은…
1952년 충남 연기에서 출생한 뒤 고려대 독문과에서 수학했다. 1979년 계간 ‘문학과 지성’에 ‘이 시대의 사랑’ 외 4편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1980년대 황지우, 이성복, 김혜순 시인 등 당대 대표 시인들과 함께 활동했으며, 기존 여성시의 전통을 무너뜨리는 전복성, 충격적인 언어 구사 등 독보적인 시 세계를 구축해 폭넓은 관심을 받았다.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첫 시집 ‘이 시대의 사랑’은 현재까지 3만5000부(33쇄)가 판매됐다.
시집으로는 ‘이 시대의 사랑’(1981년) ‘즐거운 일기’(1984년) ‘기억의 집’(1989년) ‘내 무덤, 푸르고’(1993년), ‘연인들’(1999년)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침묵의 세계’ ‘자살의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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