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증의 가족사 ‘숨막힌 3시간’…연극 ‘밤으로의 긴 여로’

  • 입력 2009년 9월 21일 04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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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오닐의 연극 ‘밤으로의 긴 여로’에서 안개는 그들의 과거를 숨겨주지만 그 안개를 경고하는 안개고동(무적) 소리는 과거로 그들을 끌고 간다. 왼쪽부터 타이런 가문의 가장인 제임스(김명수)와 그의 부인 메어리(손숙), 맏아들 제이미(최광일), 막내아들 에드먼드(김석훈). 사진 제공 명동예술극장
유진 오닐의 연극 ‘밤으로의 긴 여로’에서 안개는 그들의 과거를 숨겨주지만 그 안개를 경고하는 안개고동(무적) 소리는 과거로 그들을 끌고 간다. 왼쪽부터 타이런 가문의 가장인 제임스(김명수)와 그의 부인 메어리(손숙), 맏아들 제이미(최광일), 막내아들 에드먼드(김석훈). 사진 제공 명동예술극장
공연이 끝나고 난 뒤 명동의 인파를 뚫고 걸어갈 때 그들이 마치 안개처럼 느껴졌다. 도심의 자동차 경적소리는 연극 속 무적(霧笛·안개 경계 고동) 소리처럼 아련하게 들려왔다. 19일 명동예술극장에서 개막한 ‘밤으로의 긴 여로’(연출 임영웅)는 그렇게 긴 여운을 남기는 연극의 진수를 보여줬다.

3시간의 공연시간 내내 무대는 변함이 없었다. 미국 동북부 코네티컷 주의 한 해안 별장의 거실. 변화라곤 오직 거실 밖 창으로 끼었다가 사라지길 반복하는 뿌연 바다안개뿐. 연극 속 시간은 단 하루. 어느 여름날 아침식사 후부터 깊은 밤까지. 출연배우는 다섯. 브로드웨이의 연극배우 제임스 타이런(김명수) 가문의 네 식구와 수다스러운 하녀 캐서린(서은경).

지난밤 무적 소리 때문에 잠을 설친 네 가족의 표정엔 인위적 화목과 잠재적 불안이 교차한다. 연극은 그 불안의 정체를 계속 은폐한다. 처음엔 그 정체가 막내아들 에드먼드(김석훈)가 폐결핵에 걸렸을지 모른다는 걱정으로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이 세 부자의 불화가 폭발하는 것을 틀어막고 있는 정숙한 어머니 메어리(손숙)와 관련한 비밀임이 드러난다.

2막까지 농축됐던 이들 가족의 상처와 응어리는 3막에서 메어리의 비밀이 폭로되면서 물에 탄 잉크처럼 풀린다. 그때까지 다소 느슨한 극 전개에 맥이 풀렸던 객석은 숨을 멈춘다. 특히 저마다 술에 취한 채 밤안개처럼 집으로 스며든 세 부자가 2층 침실에서 서성거리는 메어리의 발자국 소리에 숨죽이며 고백을 펼치는 4막의 연기가 압권이다.

아일랜드 출신의 가난뱅이에서 브로드웨이 스타로 성공했지만 결코 명배우가 못 된 회한에 사로잡힌 아버지 제임스, 아버지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지만 술독에 빠진 삼류 배우로 전락한 맏아들 제이미(최광일), 자신의 출생이 가져온 비극 때문에 방황을 거듭하는 에드먼드. 각각 셰익스피어와 오스카 와일드, 보들레르로 대변되는 그들의 고뇌와 애증이 문학성 짙은 대사와 농밀한 연기로 쉴 틈 없이 펼쳐진다.

극작가 유진 오닐(극중 에드먼드)이 작가적 속살 깊이 감춰뒀던 가족사의 내밀한 상처를 드러내는 이 장면은 진주처럼 영롱하게 빛났다. 특히 사랑하는 동생을 향해 “나 자신이 끔찍해서 누구한테라도 복수를 해야만 해. 특히 너한테”라며 악마적 애증을 펼쳐낸 최광일 씨의 연기가 일품이었다. 그가 배우 최민식 씨의 동생이란 점을 감안하면 더욱 예사롭지 않은 연기다.

아쉬운 점은 세 남자 배우를 독 안의 쥐처럼 몰아넣어야 할 손숙 씨의 연기였다. 평소의 단아한 이미지가 너무 단단해서일까. 그녀는 광기에 사로잡혀 영혼의 저 밑바닥까지 헤젓는 섬뜩함을 보여주진 못했다. 10월 11일까지. 1644-2003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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