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맨얼굴’ 20선]<2>위험한 미술관

  • 입력 2009년 9월 10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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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험한 미술관/조이한 지음/웅진지식하우스

《“서양 미술사를 살펴보면 수많은 예술가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미술사가들은 그들에 대해 마치 처음부터 천재로 태어나 불멸의 명작을 창조했던 것처럼 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미술사를 좀 더 자세히 보면 그 화가들은 당대에 형편없는 작가로 비난받거나 후대의 사람들에게 완전히 잊혀지기도 하고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새롭게 주목받으면서 극적인 컴백을 하기도 한다.”》

명화, 처음부터 명화는 아니었다

독일 베를린 훔볼트대에서 미술사를 공부한 저자는 “오늘날 미술관에서 만나는 명화들이 처음부터 명작 대접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당대에는 형편없는 쓰레기 취급을 받았던 작품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대부분 당대의 금기를 깨뜨림으로써 논란을 일으킨 작품들이다. 저자는 화가의 성격이나 성장 배경 등 개인적 면모에서 파격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면서 카라바조, 프리드리히, 마네, 뭉크, 뒤샹 등 ‘스캔들 메이커’ 5명의 작품과 인생을 살폈다.

1605년 이탈리아 로마에선 교회에 바치는 제단화 한 점을 놓고 논란이 일었다. 미켈란젤로 메리시 카라바조(1571∼1610)가 그린 ‘펠레그리니의 마돈나’였다. 아기 예수, 마리아와 함께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이 지저분한 모습의 하층민이라는 게 논란의 이유였다. 카라바조는 그 뒤 다른 종교화에서도 ‘민중성’을 강조해 늘 논란의 중심에 섰다.

그림에 대한 교회의 검열이 엄격하던 시절이었지만 그는 시대에 대항하면서 예술관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저자는 그의 성장 배경에서 이유를 찾았다. 어릴 때 부모를 여읜 그는 거리에서 초상화를 그리거나 싸구려 그림을 그리는 화가 밑에서 제단화를 모사했다. 고달픈 방랑은 과격한 행동으로 이어졌다. 술집에서 난동을 피우고 툭하면 사람을 때렸다. 저자는 “그의 작품은 제도의 틀에 갇히지 않은 행동이나 삶의 방식과 무관하지 않다”고 해석했다.

독일 화가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1774∼1840)가 1808년 선보인 풍경화 ‘산 위의 십자가’는 화단으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았다. 전경, 중경, 원경으로 나눠 변화를 연속적으로 그리는 고전적 풍경화의 양식을 따르지 않고, 원근법에 관계없이 불쑥 솟은 바위를 그림 한가운데에 그려 넣었기 때문이다. 고전적 풍경화의 주요 요소인 ‘인물’도 그의 그림에서는 사소하게 취급됐다.

저자는 “프리드리히가 내성적이어서 사람을 쉽게 사귀지 못했고, 그 결과 인간보다 풍경을 주로 그렸다”고 설명했다. 어린 시절 프리드리히는 형제 9명 가운데 3명을 먼저 저세상으로 보냈는데 그중 가장 친했던 동생은 함께 얼음지치기를 하다 자신의 눈앞에서 물에 빠져 죽었다. 그 경험은 그의 예민한 성격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또 그가 빈곤한 생활을 하면서 점점 더 자기 안으로 침잠한 결과 꽃과 과일이 펼쳐진 풍경 대신 허옇게 죽은 나무와 허허로운 벌판을 그리게 됐다고 저자는 해석했다.

프랑스 화가 에두아르 마네(1832∼1883)도 미술사상 이름난 스캔들 메이커였다. 1863년 나체의 여인이 옷을 입은 남자들과 풀밭에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린 ‘풀밭 위의 식사’를 파리 살롱전에 출품해 많은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그는 대중의 비난에 굴하지 않고 1865년 매춘부의 분위기를 풍기는 비너스를 그려 ‘올랭피아’라는 제목으로 내놓았다.

카라바조, 프리드리히와 달리 마네의 파격은 ‘여유’에서 비롯됐다. 법무부 인사부장이었던 아버지와 스웨덴 출신 외교관의 딸이었던 어머니를 둔 덕분에 평생 돈 걱정하지 않고 살 수 있었다. 저자는 “돈 걱정이 없었던 덕분에 마음 내키는 대로 도발적인 작품을 계속 내놓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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