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오만과 편견’의 그들, 좀비를 물리치다

  • 입력 2009년 8월 8일 02시 59분


◇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세스 그레이엄 스미스 지음·최인자 옮김/408쪽·1만2800원·해냄

영국 하트포드셔의 작은 마을에 사는 베넷 가(家). 결혼 적령기인 딸들을 좋은 가문의 신사와 결혼시키기 위해 고민 중인 베넷 부인은 부유한 청년 빙리가 인근에 이사 오자 한껏 고무된다. 사려 깊은 귀족 청년 빙리와 그의 친구 다아시를 초대한 무도회가 열리고, 베넷가의 착하고 아름다운 첫째딸 제인과 자유분방하면서도 당찬 둘째딸 엘리자베스가 이들과 만난다.

이들이 무도회장에서 춤을 추며 서로 첫인상을 살피는 대목은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의 독자 누구나 기억할 낭만적인 장면이다. 그런데 이곳에 갑자기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것들’이 들이닥쳐 사람들을 습격한다고 상상해보자. 너덜너덜한 수의를 걸친 한 떼의 좀비들이 말이다.

이 책은 제인 오스틴의 걸작 ‘오만과 편견’에 ‘좀비’를 결합시킨 패러디 작품이다. 고전명작과 장르 아이콘 좀비의 조합? 발칙할뿐더러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작가는 때 아닌 좀비들의 출연으로 빚어지는 어처구니없는 활극을 19세기 영국 ‘오만과 편견’의 줄거리에 녹여냈다.

베넷 가의 숙녀들은 수시로 출몰하는 ‘죽은 것들’의 공격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술과 공격기술을 연마한다. 딸들의 안전이 가장 큰 목표인 베넷 씨의 확고한 신념으로 어릴 때부터 다양한 기술을 익힌 이들은 ‘중국의 소림사’에서 정통무술을 익혔다.

책이나 뜨개질 대신 툭하면 발차기에 쿵푸를 선보이고 칼, 머스킷 총을 애지중지 아끼는 엘리자베스에 자신을 물어뜯는 좀비들을 해치운 뒤 팔다리를 잘라 미안하다고 울먹이는 마음 약한 제인이라니. 게다가 허례허식을 싫어하고 원칙주의적인 성격 탓에 자칫 오만하게 느껴지지만 늠름하고 잘생겼을 뿐 아니라 1000명이 넘는 좀비를 한 번에 해치울 만큼 무예가 출중한 다아시….

일단 이런 기본적인 설정을 수긍하고 나면 큰 줄거리는 원작과 거의 흡사하다. 주인공들의 기본적인 캐릭터나 편견을 극복하며 사랑을 완성하는 모든 과정이 원작에 충실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우스꽝스럽다.

원작과 이 작품의 일부를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원작에서 다아시는 베넷 가의 경솔하고 철없어 보이는 가족을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에 친구인 빙리가 제인과 가까워지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나중에는 그 생각을 바꾸지만, 이로 인해 엘리자베스에게 ‘빙리와 제인의 사랑을 훼방 놓았다’는 오해를 받게 된다. 반면 새 작품에서 다아시는 빙리를 만나기 위해 네더필드에 오다 좀비 떼를 마주쳤던 제인이 역병에 걸린 것으로 여기고 빙리를 말리는 것으로 나온다. 친구가 역병에 걸려 죽어가는 연인 때문에 마음 아파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좀비가 등장하지만 이 소설이 호러 소설은 아니다. 좀비는 원작의 세밀한 묘사와 느린 전개를 지루하게 느낄 법한 오늘의 독자들을 위해 원작의 엔터테인먼트적인 측면을 높이는 장치로 쓰였다.

작품 끝에 실린 ‘독자분들을 위한 독서가이드’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이 작품의 이해를 돕기 위해 실었다는 우스꽝스러운 질문 중 하나는 능청맞기까지 하다.

“일부 학자들은 편집자가 뻔뻔스럽게도 판매 부수를 올리기 위해 마지막 순간에 좀비란 요소를 이 소설에 집어넣었다고 생각한다. 반면 또 다른 학자들은 좀비가 제인 오스틴의 줄거리 구성과 사회적 논평에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고 주장한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좀비들의 격렬한 폭력 장면이 없다면 이 소설이 어떨지 상상할 수 있는가?”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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