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사랑 회한 깨달음 안고 죽음 향해 질주하다

  • 입력 2009년 7월 4일 02시 52분


◇우연을 점 찍다/홍신선 지음/120쪽·7000원·문학과지성사

‘얼마나 범속한 재능에 속고 속아왔는가/얼마나 열정에만 눈멀어 마련 없이 달려왔는가/그동안 나는/허공에서 허공을 꺼내듯/시간 속에서 숱한 시간들을 말감고처럼 되질로 퍼내었다…이제 다시/어디에다 무릎 꿇고 환멸의/더 깊은 이마 조아려야 하는가’ (‘퇴직을 하며’)

시인 홍신선 씨가 일곱 번째 시집 ‘우연을 점 찍다’를 펴냈다. 삶과 죽음에 대한 존재론적인 질문들과 늙음, 쇠락에 대한 번민을 담아냈다.

‘죽음 놀이’에서 시인은 밤새워 잡은 고기를 놓아주면서 그들을 죽음 안으로 몰아넣었다 도로 풀어주는 놀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놀이판에서는 부가가치가 큰 목숨 놀이가 제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머지않아 누군가 출구를 열어 이곳의 모든 시간들/죽음 안으로 사납게 몰아넣으리라”는 점에서, 인간 역시 피할 수 없는 죽음의 놀이에 휘말려 있는 존재다.

지하철역에 썩은 소주 냄새를 풍기며 오체투지 하듯 엎드려 있는 노숙인을 보며 연민과 회의를 느끼거나(‘경기 침체와 실업의 날에’) 어떤 극적인 반전이나 구원도 없이 그저 죽음만 기다리고 있을 뿐인 암 병동의 공허함과 절망감(‘암 병동 6인실에서’)을 응시하기도 한다. 시인은 담담하고 냉정한 태도로 삶과 죽음, 현실을 직시하고 있지만 시에서 묘사되는 이런 풍경들은 쓸쓸하고 허허로운 정서를 자아낸다.

“늙음이란 하루하루 지하로 철수하는 일/폐허인 내면을 폐쇄하는 일/그렇다 더 멀고 험한 길 준비에/제 몸 깊이 살아온 시간을 거두어들이는/풀과 나무들/건설 현장 화물 승강기처럼 늦여름을/밤낮으로 무릎 관절 밑으로 실어내리고 있다/그 노역에 등 벗겨진 둑 밑의 항가새 하나/눈알만 유난히 붉은 날”(‘처서 부근에서’)

김수이 문학평론가는 해설에서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애도하는 시인의 삶에 대한 사랑과 회한, 깨달음과 각오의 말들로 가득 차 있다”며 “시인의 관심은 죽음 자체에 있지 않으며 죽음이 삶에 간섭하는 방식과 그것을 수용하는 존재의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에 있다”고 말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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