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성가족’ 고령화-저출산 풀 열쇠 되나

  • 입력 2009년 6월 25일 02시 56분


할머니 할아버지가 맞벌이 자녀부부와 가까운 곳에 거주하며 손주 돌봐
핵가족-대가족 장점 결합… 한국만의 가족형태
도시중심 급속 확산… 정부보조금 등 지원 필요

“난 더는 애 못 본다. 친구들이 뭐라는지 아니? 나이 들어 손자 손녀 봐주면 바보래, 바보.” 2007년 10월 만삭이던 회사원 이모 씨(32·여)가 남편과 한참을 상의한 뒤 서울 강남구 수서동의 친정집 옆으로 이사하겠다는 말을 꺼냈을 때 어머니 윤영희 씨(59)가 보인 반응은 이랬다. 이미 아파트 옆동으로 이사 온 언니(34)의 두 아들을 봐주는 것만으로도 너무 지쳤다는 푸념이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있던가. 이 씨는 그해 11월 친정집 옆 아파트에 전세를 얻어 이사했다. 요즘 이 씨가 퇴근해 세 살짜리 아들을 집으로 데려가려 하면 아이는 할머니와 떨어지기 싫어 떼를 쓴다. 중국 교포 도우미가 청소, 빨래 같은 집안일을 처리하지만 책 읽히기, 놀이방 보내기, 병원 데려가기 등 낮 시간 아이의 생활을 책임지는 건 전적으로 할머니의 몫이다. 이종사촌형과 많이 노는 아들은 ‘요즘 애들 같지 않다’는 말을 들을 만큼 활달하다.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할아버지(63)도 손자들을 놀이터에 데리고 가려고 일찍 퇴근하는 날이 많다.

장모에게 아이 맡기는 게 미안한 사위들은 주말이면 수시로 처가에 들러 함께 외식을 한다. 각자 자기 집에서 살지만 주말이면 3대(代)가 어우러지는 대가족이 되는 셈이다. 어머니는 때로 힘들어 하지만 자식, 손자들과 어울려 지내는 게 싫지 않은 표정이다. 며칠 전 3자매 중 막내로 4개월짜리 아들을 키우고 있는 이 씨의 여동생(27)은 “언니, 나도 엄마 옆에 가려고 하는데 엄마가 도와줄까?” 하고 전화를 걸어 왔다.

○ 한국 도시 특유의 가족 형태 ‘위성가족’

이 씨의 가족 같은 생활방식은 한국의 도시에서 낯선 모습이 아니다. 맞벌이 가정이 늘면서 출가한 자녀가 육아에 도움을 받으려고 부모 집과 가까운 곳에 살림을 꾸리는 사례가 늘고 있다. 2005년 통계청의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13세 이하 아동 중 낮 시간에 조부모가 주로 양육하는 아동의 비율은 7.96%로 2000년(6.64%)보다 1%포인트 이상 늘었다. 부모(58.22%) 학원(19.04%)보다 적지만 일부라도 양육을 도와주는 조부모를 포함하면 비율은 훨씬 높아질 것으로 추정된다.

인구학자들은 이러한 가족 형태에 주목하고 있다. 서양은 물론이고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서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서울대 보건대학원 조영태 교수(인구학)는 “부모와 자녀 세대가 각자 핵가족을 이루면서도 도움을 주거나 받을 수 있는 일정 거리 안에 살면서 대가족의 장점을 취한다는 점에서 ‘위성가족(satellite family)’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에 이처럼 특이한 가족 형태가 등장한 건 산업화 및 도시화의 속도가 유달리 빨랐고, 전 국민(올해 통계청 추계 4874만7000명) 중 절반 정도인 2412만8000명이 수도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1960, 70년대 도시화가 급속히 진척되면서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옮긴 사람 중 대부분은 은퇴하고도 수도권에 머무르고 있다.

결혼한 자녀 세대, 특히 맞벌이 부부들은 아직까지 만족스럽지 못한 공공육아 시스템을 대신하거나 보완하기 위해 은퇴한 부모 세대에 의지하면서 부모와 근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곳에 생활 거점을 정하고 있다. 노년층에도 부담만 되는 건 아니다.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에 사는 이모 씨(59·여)는 “손녀를 돌봐주고 매달 받는 50만 원 정도의 용돈이 생활에 상당히 도움이 된다”며 “특히 자식들이 옆에 살기 때문에 자주 만날 수 있고, 몸이 아플 때에도 의지할 수 있어 안심이 된다”고 말했다.

○ “저출산·고령화 동시 해결의 실마리”

인구전문가들은 ‘위성가족’이 한국 사회에서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저출산 문제와 고령화 문제를 동시에 풀 실마리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조부모들이 손자 손녀의 양육에 적극 개입함으로써 자녀들의 육아 부담을 줄여 출산율을 높이고, 늘어나는 고령층은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아 경제적, 정서적 안정 등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고려대 황명진 사회학과 교수는 “핵가족화가 진전됐다고는 하지만 한국은 혈통주의가 강해 도시 안에서도 내용상 대가족 형태가 유지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정부는 이런 현상에 대한 정확한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여성의 사회 진출, 자녀 양육, 노인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영태 교수는 “위성가족을 적극 장려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건 의외로 사회 문화적 분위기”라며 “조부모가 손자 손녀를 데리고 외출하는 게 자랑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먼저 조성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2006년에 정부가 검토하다가 예산 문제로 포기한 ‘장모 수당’ 같은 제도가 위성가족에 대한 지원책이 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설명한다. 호주 등에서 이미 시행되고 있는 이 제도는 손자 손녀를 키워주는 조부모에게 지원금을 주는 방식이다. 이와 함께 아파트 단지 안에 노인정 등 노인들을 위한 시설과 놀이터 등 육아시설을 복합해 짓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길진균 기자 leon@donga.com

장원재 기자 peacechao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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