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그린 시인의 자화상

  • 입력 2009년 5월 13일 02시 54분


《한국 근현대시 중 ‘자화상’이란 제목을 가진 시들은 드물지 않다. ‘애비는 종이었다’로 시작하는 서정주의 ‘자화상’, 성찰적 어조로 우물 속에 비친 자신을 노래한 윤동주의 ‘자화상’ 등. 문학으로 일가를 이룬 시인들이 자기 고백적 언어로 쓴 자화상은 문학적 감동뿐 아니라 친밀감, 인간미를 함께 느끼게 한다. 시 전문 계간지 ‘시인세계’는 최근 발간된 여름호에서 작고· 생존시인들의 자화상을 주제로 한 기획 ‘시인들의 자화상, 시로 쓴 자화상’을 실었다. 이상, 김광섭, 고은 시인이 발표한 기존 시 10편과 김종길, 김규동, 김남조, 김지하, 강은교 시인 등 10명이 스스로를 되돌아본 신작을 수록했다. 짧은 시 안에 압축적으로 그려진 시인들의 자화상은 그들 시 세계의 면면만큼이나 다채롭다.》

“나는 막 걸음마를 뗀 어린아이” “남보다 늦은 40대에야 감성이 일시에 만발하여…”

담백한 자기고백 언어… 친밀감-인간미 더해

문단의 어른이자 삶의 황혼기를 맞은 원로시인들의 자화상 속에는 여전히 장난기 어린 유년시절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생후 2년여 만에 어머니를 잃은 김종길 시인은 증조부, 증조모, 조모 아래 자랐다. 김 시인은 “그분들이 돌아가신 지 어언 6, 70년,/나는 그분들보다 더 오래 살아/여든을 넘긴 지도 몇 해가 된다/그러나 아직도 그분들은 마음 졸이며 지켜보신다/아직도 나는 막 걸음마를 뗀 어린아이/…벼루에 먹을 갈아 글씨도 써보고 그림도 그려보는 아이”라고 노래한다.

함경북도 경성에서 태어난 김규동 시인의 자화상 한편에는 고향에 대한 진득한 그리움이 자리 잡고 있다. “고향에 돌아못가는 슬픔이/화석으로 남아/몸과 마음 함께 차다…어린 시절 공부 못하는 장난꾸러기였던 나는/85살 되어서도/온갖 장난이 하고 싶어 사방 두리번거리는 도깨비다.”

시인으로서의 자의식과 예술가의 비애감, 창작혼 등과 정면으로 마주선 시편들도 눈에 띈다. 김남조 시인은 ‘처음 써보는 자화상’에서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중심으로 삶을 되짚는다. “남보다 늦은 사십대에야/감성이 일시에 만발하여/내가 달다 내가 지금 몹시 달다고/소리 없이 절규했고…나의 감수성 이 하나가/쇠퇴 없이 오늘에 이르렀고/내일에 이어간다면/얼마동안은 더 영광스럽게도/내가 시인의 반열에 머물리라”(‘처음 써보는 자화상’)

문정희 시인 역시 ‘천사와 창녀’에서 “천사이며 창녀인/눈부신 시인이 되고 싶었지만…쥐라기 시대 파충류 같은 신비한 시구 하나를 허공에다 점점이 키우고 싶었지만/밤낮 짐승의 몸으로 쫓기며/진눈깨비처럼 빈 들에서 울다가/제자리에 현기증처럼 스러질 뿐이었다”고 시인으로서의 열정과 고뇌를 노래한다. 고은 시인의 자화상은 시인들이 간직한 부끄러움과 순수함을 잘 보여준다. “내가 부른 노래/내가 부르지 못한 노래들이/우르르/불 켜들고 내달려오는/나일 줄이야/이 찬란한 후회가 나일 줄이야”

시와 함께 ‘자화상’을 다룬 한국 현대시를 심리학적, 문학적 관점에서 분석한 글도 수록됐다. 이나미 서울대 교수는 “영미의 유명 현대시에 비해 한국 현대시에는 유독 대중화된 ‘자화상’이란 제목의 시가 많은데 이는 자신을 하나의 대상으로 객관화하며 타인의 시선을 끊임없이 의식하는 한국인의 심성 때문”이라고 말했다. 문학평론가 정효구 씨는 “‘자화상’은 자아 사유의 한 방식으로서 근현대의 절실한 내적, 미학적 트렌드의 한 형태였다”며 “한국 시인들의 자화상 속에 발견되는 우수, 우울, 공포, 분노 등은 ‘자아의 진화사’ 속에서 거쳐야 할 필수 코스의 일종”이었다고 말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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