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두 얼굴의 외과의사… 위선을 해부하다

  • 입력 2009년 4월 18일 02시 58분


◇죽음의 해부/로렌스 골드스톤 지음·임옥희 옮김/544쪽·1만3000원·레드박스

1889년 웨스트 필라델피아 대학병원 뒤편의 브로클리 시체 안치소. 임상의학부 과장 윌리엄 오슬러 교수가 시체 다섯 구를 놓고 제자들과 함께 해부학 실습수업을 가진다. 6년 전만 해도 교육용 시체 해부가 범죄 행위였지만, 이날 오슬러 교수는 종일 연구를 진행할 만큼 충분한 기회가 생긴 변화로 흥분해 있다.

열정적으로 각 시체의 사인을 밝혀가던 오슬러 교수가 마지막 시체의 관 뚜껑을 연다. 아름다운 소녀의 시신이 나온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 그는 당황한 기색으로 실습수업을 그냥 끝내버린다. 며칠 뒤, 소녀의 시신은 사라지고 그날 해부를 참관했던 의료진 중 한 명이 독살된다.

19세기 미국 의학계의 부조리한 현실을 추리소설 형식으로 다룬 이 소설은 임상실험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윌리엄 오슬러 교수와 존스홉킨스 병원의 초창기 의학대가 중 하나인 윌리엄 홀스테드라는 실존인물을 내세웠다. 실존인물이 등장한다는 점, 객관적 행적 중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는 점에서 사실과 허구를 결합한 팩션이다.

해부학 실습의 미심쩍은 중단에서 출발한 소설은 촉망받는 젊은 의사 캐롤이 이들의 죽음에 도사린 음모를 추적해 가면서 전개된다. 보잘 것 없는 시골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캐롤은 의사로 성공해 신분 상승을 이루고 싶은 야심뿐 아니라 의료인으로서의 자긍심으로도 가득 찬 인물이다. 음침한 시체안치소를 선진적인 해부학 실험실로 바꿔놓은 오슬로 교수를 아버지처럼 따르고 존경하는 캐롤은 그로부터 곧 생길 존스홉킨스대의 임상의학 수석보조 자리를 제안받는다. 기뻐하기도 잠시, 함께 섭외된 주요 의사 중 윌리엄 홀스테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오슬러 교수의 절친한 친구이자 외과용 수술 고무장갑을 발명했지만, 약물중독자로 알려진 자였다. 이에 대한 오슬로 교수의 해명은 명료하다.

“홀스테드는 중요한 인물이네. 수천 명의 목숨이 달려 있는 문제란 말일세. 문자 그대로 수천 명의 목숨 말이야. 그가 과거에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네.”

시간이 갈수록 캐롤은 부검할 소녀 시신의 죽음과 동료의 독살 배후에 오슬로 교수가 연관돼 있다는 의혹을 떨칠 수 없어 갈등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수술 현장에서 일어나는 온갖 부조리한 상황들을 목격한다.

손도 씻지 않거나 담배를 피우면서 수술을 집도하는 외과 수술실, 부적절한 기구를 사용하고 초짜 재봉사보다도 못한 수준으로 수술 부위를 봉합하는 의사들, 뒷돈을 벌기 위해 불법 임신중절 수술도 마다하지 않는 젊은 의사들. 이런 끔찍한 수술 때문에 설혹 환자가 죽어도 그 의사는 병원에서 쫓겨나지 않는다. 개인적 친분에 따라 의사들이 의료사고를 낸 자신의 동료를 무조건 감싸고돌기 때문이다.

경찰이 엉뚱하게도 캐롤의 동료의사 중 한 명을 범인으로 지목해 체포하는 와중에 캐롤은 우연히 죽은 소녀의 정체를 알게 되면서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간다. 그는 곧 이 사건 역시 자신이 목격했던 의료 현장의 참혹한 현실 때문에 일어났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진짜 범인이 누군지 알게 된다.

작가는 19세기 의학계의 거물이었던 윌리엄 홀스테드가 모르핀을 정기적으로 맞았던 약물중독자였다는 사실에서 작품을 착안했다. 이는 동료의사였던 오슬러 교수가 쓴 책 ‘존스홉킨스 병원의 내부 역사’에서 참고한 사실이다. 살인사건을 둘러싼 일련의 과정은 모두 허구이지만, ‘의학의 진보를 위해 도덕적 과오를 덮어주는 것이 정당한가’라는 질문을 바탕으로 당시의 열악한 의학계 현실과 의사들의 도덕불감증 등을 사실적으로 풀어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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