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 고택 터 ‘경매의 亂’

  • 입력 2009년 3월 26일 02시 59분


충남 아산시 현충사 경내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고택 터. 오른쪽 원 안은 충무공의 영정. 아산=연합뉴스
충남 아산시 현충사 경내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고택 터. 오른쪽 원 안은 충무공의 영정. 아산=연합뉴스
1931년 동아일보 보도에 힘입어 전 국민의 성금이 모였고 이를 통해 현충사를 중건하게 됐다는 내용을 보도한 1932년 5월 29일자 동아일보.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31년 동아일보 보도에 힘입어 전 국민의 성금이 모였고 이를 통해 현충사를 중건하게 됐다는 내용을 보도한 1932년 5월 29일자 동아일보. 동아일보 자료 사진
15대 후손 宗婦 명의 사유지… 채권자가 7억에 청구

현충사 안 충무공 자란 곳… 건물은 사적이라 제외

관리소 “종손이 매입한 뒤에 정부서 재매입 추진”

충남 아산시 현충사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 고택 터 등이 경매 위기에 처하자 정부가 이를 매입하는 방안을 추진키로 했다.

현충사관리소와 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에 따르면 문화재로 지정된 아산 현충사 경내의 이 충무공 고택 터 3필지 7만4711m²와 현충사 주변 문화재보호구역 내 임야와 농지 4필지 등 7건 9만8000여 m²가 경매 물건으로 나왔다. 1차 경매는 30일 오전 10시 제2호 법정에서 열린다.

경매로 나온 이 용지는 이 충무공의 15대손 종부(宗婦)인 최모 씨의 사유지다. 이곳엔 이 충무공이 소년 시절부터 무과에 급제할 때까지 살았던 고택을 포함해 이 충무공의 셋째 아들인 이면의 묘와 이 충무공의 장인, 장모 묘소가 있다.

그러나 해당 용지에 있는 한옥 고택(3901m²)과 묘, 60년생 소나무 3869그루 등은 법원이 경매에서 제외했다. 이들은 사적 155호인 이 충무공 관련 유적의 일부로, 개인이 소유해 함부로 변형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용지를 7억 원에 경매 청구한 사람은 채권자인 김모 씨(70). 최 씨는 8년 전 남편 이모 씨가 사망한 뒤 자식이 없어 이 재산을 상속받았지만 사업에 실패해 빚을 많이 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재산은 본래 덕수 이씨 문중 소유였으나 1970년대 종손 개인 명의로 등기됐다.

보존 가치가 높은 충무공의 유적 용지가 경매로 나온 것은 문화재 당국이 좀 더 적극적으로 매입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정부는 이 용지를 매입할 기회를 두 번이나 놓쳤다. 정부는 1967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지시로 현충사 성역화 사업을 할 때 현충사 사적지 84만6000여 m² 가운데 48만9000여 m²만 국유지로 확보하고 나머지 42.2%는 사유지로 유치한 채 보존 관리만 해왔다. 이 충무공 종손들이 제사를 지내야 한다며 팔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2006년에도 매입 건의가 있었으나 성사가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문화재청은 개인 간에 이뤄지는 경매에 국가기관이 참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다른 방법으로 매입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현충사관리소 관계자는 “개인이 경매물건을 매입해도 재산권 행사를 할 수 없어 실익이 없다”며 “우선 종손이 매입하도록 한 뒤 정부가 재매입하기로 협의를 마쳤다”고 말했다.

아산=지명훈 기자 mhjee@donga.com

▼충무공 관련 땅 일제강점기에도 경매 위기▼

1931년 본보 보도에 국민성금… 채무 갚아

930년대에도 이 충무공 관련 재산이 경매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다.

1931년 3월 충무공 묘위토(묘에서 지내는 제사 비용 마련을 위해 경작하는 논밭·지금의 현충사 근처)가 당시 덕수 이씨 종손(이종옥)의 부채 때문에 경매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을 동아일보가 처음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이와 함께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해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의 장편소설 ‘이순신’을 연재(1931년 6월∼1932년 4월·178회)했다.

이 같은 내용을 접한 독자 2만여 명(400여 단체 포함)은 성금 1만6000원을 보내왔다. 1932년 5월 이 돈으로 충무공 유적보존회가 발족돼 채무를 갚고 현충사를 중건했으며 묘소와 비각을 정비했다. 동아일보에 만평을 그리던 화백 청전 이상범(靑田 李象範)은 충무공 영정을 그려 현충사에 봉안했다.

‘민족적 지정(至情)의 결정(結晶)’ 등 당시 두 편의 동아일보 사설은 뜨거웠던 국민 성원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민족적 지정의 발견에 있어서는 상하를 묻지 아니하며 해내외(海內外)와 경향의 구별이 없었으며, 빈부의 이(異)가 없었다. 혹은 끼니를 굶어 (성금을) 보내기도 하며, 혹은 의복을 팔고, 혹은 품을 팔아 보내는 이도 있으며….”

아산=지명훈 기자 mhj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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