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사도세자 최후 친필은 어떤 내용?

  • 입력 2009년 3월 23일 02시 56분


‘중국역사 회모본’ 화첩에 실린 서유기와 삼국지 묘사 그림 중국역사 회모본 중 손오공이 세 마리 소와 싸우는 서유기 장면을 묘사한 그림(왼쪽)과 계책에 빠진 위나라 군사들이 오나라 수군에게 몰살당하는 삼국지 장면을 그린 그림. 칼과 무기, 무예를 좋아한 사도세자는 손오공이 강한 적을 물리치며 활약하는 서유기 그림 등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지…. 그림 옆쪽의 한자 제목은 사도세자가 썼다. 그림 위쪽의 한글은 궁중 화원이 쓴 것으로 보인다. 사진 제공 국립중앙도서관
‘중국역사 회모본’ 화첩에 실린 서유기와 삼국지 묘사 그림 중국역사 회모본 중 손오공이 세 마리 소와 싸우는 서유기 장면을 묘사한 그림(왼쪽)과 계책에 빠진 위나라 군사들이 오나라 수군에게 몰살당하는 삼국지 장면을 그린 그림. 칼과 무기, 무예를 좋아한 사도세자는 손오공이 강한 적을 물리치며 활약하는 서유기 그림 등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지…. 그림 옆쪽의 한자 제목은 사도세자가 썼다. 그림 위쪽의 한글은 궁중 화원이 쓴 것으로 보인다. 사진 제공 국립중앙도서관
■ 사도세자 최후 친필 ‘중국역사 회모본 서문’은 어떤 내용?

“이 책들이 병과 외로움 치유에 도움 줄것”

中소설-천주교 서적 등 83종 제목 일일이 기록

사도세자 최후의 친필로 확인된 화첩 중국역사 회모본(中國歷史繪模本) 서문에는 금병매 육포단 같은 연정소설, 천주교 서적 등 당시 대리청정(왕 대신 세자가 정사를 보는 것) 중이었던 왕세자가 드러내 놓고 읽을 수 없었던 책들이 적혀 있다.

사도세자가 서유기 같은 소설을 그림으로 그린 화첩을 보면서 서문을 쓴 시기는 영조의 어명으로 뒤주에 갇히기 나흘 전인 1762년 윤5월 9일로 사도세자의 불안이 극에 달했을 때다. 당시 영조는 형조판서 윤급의 청지기 나경언에게서 사도세자의 비행을 듣고 크게 분노했으며, 사도세자는 매일 새벽 창경궁 시민당 뜰에 나가 죄를 빌어야 했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는 “왕과의 갈등이 극에 달한 상태에서 죽음을 앞에 두고 다소 한가로운 글을 쓴 모순적 상황은 불안한 정신 상태의 사도세자가 위안을 찾으려 한 심정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사도세자는 화첩 서문에 서유기, 평요전(平妖傳·중국의 괴기소설), 수호지 내용을 소개한 뒤 “한 고조가 발에 화살을 맞는 것과 송강의 충의와 백아(伯牙)가 지기를 알아보는 것은 오랫동안 귀감이 될 만하고 위공(衛公)이 학을 좋아하다 나라를 망치고 항적(항우)이 오강에서 스스로 목을 베고, 평요전의 미아(媚兒)가 요괴로 변하고 팔계가 술을 좋아하고 색을 밝히는 것은 100년 뒤라도 경계할 만하다…이 한 권에 여러 시대가 다 있으니 봄날 겨울밤 병과 외로움을 치료하고 소일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썼다. 당시 사도세자가 앓고 있었던 신경증을 암시하는 내용이 포함된 것이다.

또 사도세자는 “세상에 책이 많아 그중 귀감이 되고 경계가 될 만한 것과 웃음을 줄 수 있고 사랑스러운 것을 뽑아 책(화첩)을 만들고 서문과 발문을 써서 후손에 전하니 아무렇게나 보지 말라”며 성경직해(聖經直解), 칠극(七克) 같은 천주교 서적, 금병매 등 연정소설, 장·단편 및 연작소설 등 83종의 책 제목을 일일이 썼다.

사도세자는 신분을 감추기 위해 여성이 이름을 밝힐 때 쓰는 방식으로 완산 이씨라 서명했다. 정병설 서울대 교수는 “서문을 쓴 장소인 장춘각과 여휘각(여휘당)이 창경궁 통명전의 부속 건물이었으며 한중록에 따르면 1762년 윤5월 당시 통명전의 주인은 사도세자였기 때문에 서문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사도세자밖에 없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사도세자의 유고 문집 능허관만고에 이 화첩의 서문이 변형돼 ‘화첩제어(畵帖題語)’ ‘후제(後題)’로 실린 사실을 함께 밝혀냈다. 능허관만고에는 소설의 제목이나 내용이 다 빠졌으며 “봄날 겨울밤 병과 외로움을 치료하고…”라는 대목도 삭제됐다.

정 교수는 “사도세자가 소설과 천주교 서적을 즐겨 읽었다는 것은 처음 알려진 사실”이라며 “사도세자의 방대한 독서 편력 중 왕세자로서 명예롭지 못하다고 생각된 부분이 후대에 생략됐다”고 말했다.

또 화첩에는 사도세자가 그림마다 직접 단 한자 제목이 달려 있다. 어린 시절부터 칼과 무기를 좋아한 사도세자가 여러 무기가 등장하는 서유기 같은 소설의 환상 세계가 담긴 화첩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죽음이 턱밑까지 닥친 현실의 공포를 잊으려 했을 것이라는 게 정 교수의 설명이다.

사도세자는 최후 친필을 남긴 나흘 뒤인 윤5월 13일 창경궁 휘령전(현재의 문정전)에서 영조의 명으로 뒤주에 갇혔으며 8일 뒤인 21일 숨졌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 사도세자 ‘비극의 죽음’ 왜?

▼14세부터 대리청정… 노론 집중견제 받아

신경증 - 우울증 시달리다 뒤주갇혀 최후▼

사도세자는 왕위를 계승할 원자를 오랫동안 원했던 영조가 41세에 극적으로 얻은 아들이다.

어린 시절에는 영조가 소년천자(少年天子)라 부를 정도로 영특했다. 세자 시절 소론 계열의 학자들에게 공부한 사도세자가 14세(1749년)부터 대리청정을 하자 노론의 집중 견제를 받았다. 사도세자는 자신을 지지하던 소론 대신들이 잇달아 세상을 뜨고 노론이 득세하자 신경증과 우울증에 시달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나기 1년여 전인 1761년 4월 영조 몰래 관서 지방을 여행했다. 사도세자의 빈 혜경궁 홍씨가 남긴 회고록인 한중록에 따르면 1762년 5월에는 땅을 파 세 칸짜리 지하방을 만들어 말과 무기를 감추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실록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아들인 은전군의 어머니 귀인 박씨를 죽였으며 서울 안암동의 여승을 궁으로 데려오기도 했다.

운명의 윤5월 13일. 영조는 창경궁 휘령전(문정전)에서 사도세자에게 자결을 명했고 세자가 통곡하며 거부하자 뒤주에 가두고 서인으로 폐했다. 열 살이던 세손(정조)이 “아버지를 살려 달라”며 엎드려 울었으나 영조는 흔들리지 않았다. 사도세자는 갇힌 지 8일 만에 고통스러운 삶을 마감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