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호 교수, 각계인사 70여명에 대한 기억 책으로

  • 입력 2009년 3월 23일 02시 56분


피란지서 철학강의 개설한 박종홍…

독재 비판하며 부통령직 던진 仁村…

“나는 (서울대 철학과) 2학년 때 비로소 피란 수도인 부산에 와서 (서구) 대신동의 (판잣집) 임시 교사에서 처음으로 박 선생님의 강의를 구경했다. 강의실은 입추의 여지없이 메워져 있었고 군복을 입고 있는 수강생들도 적지 않았다.…한국 대학사(大學史)에 길이 남을 만한 6·25전쟁 중에 개강한 박 선생님의 ‘철학개론’ 시간의 광경이었다.”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사진)가 잊지 못하는 열암(洌巖) 박종홍 전 서울대 교수(1903∼1976)의 첫 강의다. 1950, 60년대 한국 철학계를 대표한 박 전 교수는 스무 살 청년이었던 그에게 철학과 철학자가 사회에 왜 필요한지를 깨닫게 해준 ‘스승’이었다.

동아일보 객원대기자인 최 교수가 최근 펴낸 ‘사람을 그리다’(시그마북스)는 50여 년 동안 집필 활동을 해온 그가 기억하는 스승과 지도자, 정치인, 학자, 예술인 70여 명에 대한 기록이다.

최 교수는 동아일보를 설립한 인촌(仁村) 김성수 선생(1891∼1955)을 당대 지도자로 회고한다. 1951년 5월 부통령에 선출된 인촌이 1년 뒤 우남 이승만(1875∼1965)의 독재를 비판하며 국회에서 공표한 사임이유서는 당시 그를 비롯한 대학 신입생들이 돌려보던 문서였다고 한다.

최 교수는 또 “일제강점기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해 광복군 활동을 했던 김준엽 박사(전 고려대 총장)가 ‘일제강점기 그 당시에는 동아일보를 한국의 정부로 생각했다’고 증언했다”고 전했다.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1913∼1992)는 그가 흠모했던 정치인 중 한 사람이다. 하이델베르크대에서 공부할 때 우연히 브란트 당시 베를린 시장을 만난 그는 “(그 인격에 끌려) 베를린자유대로 학교를 옮겼다”고 말했다. 한국의 언론을 대신해 인터뷰도 여러 차례 했다.

1992년 10월 일본 도쿄의 한 호텔에서 브란트 전 총리의 부고를 들었을 때 “현직 독일 총리로 폴란드를 방문해 바르샤바의 유대인 희생자들을 위한 기념비 앞에서 비에 젖은 땅바닥에 무릎을 꿇은 모습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독일 유학 시절 가깝게 지냈던 작곡가 윤이상(1917∼1995)의 정치적 행보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1970년대 이후 정치적 행보는 남북한의 어느 쪽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어느 쪽으로부터도 환영받기 어려운 것이었다고 본다. 그것은 윤이상 개인의 ‘반남한 친북한’적인 정치적 성향과 윤이상 음악의 서방적인 성향의 모순이 빚은 필연적인 귀결이다.”

책에는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전 대통령,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와 카를 야스퍼스, 이상범 박수근 화백과 건축가 김수근, 하길종 감독과 배우 최불암 씨 등에 대한 이야기도 담겼다.

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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