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英왕실에 펼친 조선병풍… 극단 미추 ‘리어왕’

  • 입력 2009년 3월 19일 02시 53분


마당놀이 보는듯한 중세비극

극단 미추의 ‘리어왕’은 20폭 병풍으로 시작해 병풍으로 끝난다.

병풍이 열리면 조선 경복궁의 경회루가 연상되는 목조건물 무대에서 잉글랜드 왕실 풍경이 펼쳐진다. 그런데 묘하다. 동서양 양식이 섞인 갑옷과 복장을 갖춘 인물들이 부모와 자식의 도리를 놓고 다툰다. 여기서 병풍이 다시 등장한다. 리어왕이 세 딸에게 나눠줄 영토를 그린 지도를 텅 빈 6폭 병풍이 대신한다. 리어왕의 광기가 폭발하는 폭풍우 치는 황무지 장면에서도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오두막으로 화폭이 갈가리 찢긴 6폭 병풍이 나온다.

무대 사방에 쳐진 겹겹의 발은 또 어떤가. 동양 전통의 반투명 막인 발은 뮤지컬 ‘드림걸즈’의 최첨단 발광다이오드(LED) 패널 못지않게 다양한 공간을 창조해냈다. 스포트라이트 효과가 필요할 때 겹겹의 발을 내려 무대 공간을 최대한 좁힌다. 한 무대 위 2, 3개의 공간에서 펼쳐지는 장면을 한꺼번에 보여줄 때도 유효하다. 발 너머에서 배우들의 그림자와 목소리가 비치는 가운데 내밀한 독백이 펼쳐지는 겹겹의 공간을 만들어 낸다.

LED 패널의 영상을 대신하는 것은 관객의 상상력이다. 텅 빈 병풍의 화폭에서 지도를 읽고 발이 한 번 내려오고 올라가는 동안 기나긴 시간의 흐름을 포착한다. 동양화의 ‘여백의 미’가 살아나는 순간이다. 연출가 이병훈 씨는 생략과 은유의 묘미로 관객의 상상력에 물길을 터준다.

그렇게 터진 물길을 세차게 거슬러 올라오는 연어처럼 힘찬 감동을 안겨주는 것은 배우들의 몫이다. 리어왕(정태화)의 서자 에드먼드(정나진)의 간교에 속아 장남 에드거(조원종)와 두 눈을 잃는 글로스터 백작(김현웅)이 에드거와 애끓는 부자의 정을 나누는 장면은 리어왕과 셋째 딸 코딜리아(박설헌)의 그것을 능가한다. 미추의 장기인 마당놀이의 심청과 리어왕이 만난 듯한 느낌도 준다.

막판 에드먼드와 에드거의 결투는 배우들이 얼마나 많은 훈련을 했는지 보여준다. 운명의 맹목성을 상징하듯 두 눈을 가린 상태에서 긴 장대를 서로에게 휘두르는 두 배우가 조성하는 긴장감은 눈을 가리고 외줄을 타는 한국 전통 광대만큼 아슬아슬하고도 애달프다. 우리 배우들이 셰익스피어 연극의 최고봉을 올라타고 한판 놀이를 펼치는 듯하다. 지난해 4회 공연만으로 2008 대한민국연극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22일까지 서울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1만5000∼3만 원. 02-747-5161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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