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전막후]“우리얘긴줄 알았는데 살인사건 배경이라니…”

  • 입력 2009년 3월 5일 02시 58분


연극 ‘경남창녕군길곡면’을 보러 온 경남 창녕군 길곡면 주민들과 주연 배우들이 28일 무대 위에서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염희진 기자
연극 ‘경남창녕군길곡면’을 보러 온 경남 창녕군 길곡면 주민들과 주연 배우들이 28일 무대 위에서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염희진 기자
연극 ‘경남창녕군길곡면’ 보러 상경한 경남 창녕군 길곡면 주민들의 헛웃음

공연은 예정 시간 5분이 지나도 시작되지 않았다. 잠시 후. 뒤늦게 도착한 단체 관람객이 앞줄부터 채워나갔다. 술렁이는 객석을 향해 누군가 속삭이는 한마디. “우리, 연극 속 그 동네서 올라왔으예.”

김점기 면장(50)을 포함해 경남 창녕군 길곡면 주민 23명이 지난달 28일 오후 3시경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에 들어섰다. 이 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 ‘경남창녕군길곡면’을 보기 위해 5시간 동안 관광버스를 타고 온 것. 고향을 제목으로 내건 연극이 서울에서 공연된다는 것을 지역 신문에서 본 김 면장이 서울 기획사로 전화를 걸어 단체 관람을 요청했다.

하지만 연극은 ‘기대’와 달리 길곡면이 아니라 서울 강북의 한 주택가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같은 직장 배달 운전사와 판매 직원으로 일하는 남편 종철(이주원)과 아내 선미(김선영)에게 예정에 없던 아기가 생긴 것이 연극의 출발점이다. 이때부터 아이를 낳겠다는 아내와 생활 형편상 키울 수 없다는 남편의 불화가 시작된다.

극 중에서 길곡면이 언급되는 건 딱 한 번. 화해한 부부가 “경남 창녕군 길곡면에 사는 서른한 살의 김모 씨가 낙태에 찬성하지 않은 임신한 아내를 살해했다”는 신문 기사를 읽고 있는 장면에서다.

공연이 끝나고 로비에 모인 주민들의 표정이 떨떠름해 보였다. 주민 김영근 씨(52)는 “길곡면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살인사건이 일어난 곳이라 하니 당황스럽다”고 말했다. 길곡면 주민들의 반발을 살 것 같아 무대 뒤쪽에 숨어있던 류주연 연출(39)은 면장, 이장과 면담을 자청했다. 다음은 대화의 일부다.

“왜 살인사건의 배경이 하필 길곡면이냐 하실 거예요. 암요. 그래서 오신다고 했을 때 상처받으시진 않을까 걱정했고요.”(류 연출)

“몰라서 그렇지 길곡면 원래 좋은 곳입니더. 허허.”(김 면장)

“보시면 알겠지만 독일 원작의 제목도 외곽도시 중 하나인 ‘오버외스터라이히’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어디에서도 이 부부가 겪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적당한 마을 이름을 찾던 차에 주인공 이주원 씨가 고향인 ‘경남창녕군길곡면’이 어떠냐고 해서….”(류 연출)

“그렇지예, 그게 어디 뭐 길곡면만의 얘기겠습니까. 항의하러 온 건 아니고예, 주민들끼리 모처럼 연극도 보고 서울 구경도 하고 뭐, 그런 거지예.”(김 면장)

주민들은 배우 연출과 함께 무대 위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다시 길곡면으로 향했다.

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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