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혼돈의 17세기 지식인으로 산다는 것은…

  • 입력 2009년 1월 17일 02시 58분


◇17세기 조선 지식인 지도/이경구 지음/279쪽·1만6000원·푸른역사

김장생-김육 등 조선시대 학자 11명 사상 조명

17세기 초 조선 지식인은 절박했다. 광해군의 실정(失政)에 인조반정(1623년)으로 정권을 잡은 세력은 유교적 이상을 정치에 실현하겠다고 했지만 곧바로 병자호란(1636∼1637년)을 맞았다. 청나라에 패해 ‘오랑캐’와 사대(事大)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무너진 자존심과 사회질서를 재건하는 책무는 당시 지식인들에게 선택이 아닌 당위의 문제였다.

이 책은 17세기 조선 사회를 대표하는 지식인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들은 사회질서 재건이라는 목표는 서로 다르지 않았지만 고민에는 차이가 있었다.

김장생(1548∼1631)은 산림(山林·과거를 거치지 않고 천거로 등용된 재야 학자)의 시대를 연 인물이다.

그는 인조반정으로 정권 실세가 된 서인의 스승이었다. 서인은 15세기 말 이후 기득권층인 훈구파를 비판하며 중앙정치 무대에 진출해 16세기 중반 이후 정계를 장악한 지방 사림(士林) 중 온건파를 가리키는 말.

이이 송익필 성혼의 수제자였던 김장생은 광해군의 폭정을 피해 충남 연산(連山)에 내려가 10여 년간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 인재들을 키워냈다. 인조 때 산림이 중용되면서 이들이 이후 조선 정치를 좌우하게 된 출발점이 김장생이었던 것.

김장생과 달리 실용파의 대표적 인물이 김육(1580∼1658)이다.

인조 때 관직을 시작한 김육은 토지세와 가구별 공납을 토지 기준으로 일원화하는 대동법 시행을 놓고 김장생의 아들 김집을 비롯한 산림과 대립했다.

김집은 대동법의 취지에는 반대하지 않았지만 사회 문제를 덕성을 통한 교화가 아니라 제도를 통해 푸는 것은 유교정치 이상에 맞지 않는다며 김육을 비판했다.

저자는 김육에 대해 “유학에서 위민(爲民)이라는 민생 중심 논리를 중시했던 인물”이라고 말한다.

요순삼대처럼 재주와 학덕을 겸비한 성왕(聖王)이 다스리는 정치를 꿈꾸었던 근본주의자는 윤휴(1617∼1680)였다.

저자는 성리학을 조선 현실에 맞게 재해석하려 했던 윤휴를 “뿌리로 회귀하기에 근원적(radical)이며 고대의 이상을 현실에서 기획했기에 급진적(radical)”이라고 말한다.

그가 송시열과 벌인 예송(예법 논쟁)은 근본주의자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현종이 즉위하면서 선왕 효종에 대한 자의대비(인조의 계비)의 상복을 둘러싸고 벌어진 기해예송 때 “자의대비도 효종의 신하로 봐야 하기 때문에 그에 맞는 예를 갖춰야 한다”며 왕가의 특수성을 주장했다.

송시열이 “자식이 어머니를 신하로 삼을 수는 없다”며 보편성을 강조한 것과 달랐다. 저자는 윤휴에게 이상적인 국가는 왕권을 강화해 사대부의 특권을 제한하고 공공복리를 증진하는 나라였다고 말한다.

한림대 한림과학원 교수인 저자는 유불선을 넘나들며 주자학과 다른 학문의 교류를 꿈꾼 장유, 17세기 후반 서울의 영향력이 빠르게 확대되면서 느낀 지방 지식인의 소외감을 보여주는 이현일 등 당시 지식인 11명의 고민을 풀어냈다.

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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