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자는 빈 컵… 뭐가 담길지 기다릴뿐”

  • 입력 2009년 1월 6일 03시 00분


“무섭게 생겼다고요? 중학교 이후로 싸움 해본 일 없어요.” 지난해 국내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휩쓴 배우 김윤석은 “배우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며 “어떤 배우가 자신이 정점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엄청난 착각일 것”이라고 말했다. 손택균 기자
“무섭게 생겼다고요? 중학교 이후로 싸움 해본 일 없어요.” 지난해 국내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휩쓴 배우 김윤석은 “배우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며 “어떤 배우가 자신이 정점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엄청난 착각일 것”이라고 말했다. 손택균 기자
지난해 ‘추격자’로 6개 국내 영화제 남우주연상 독식 김윤석

《실핏줄 터져 붉어진 흰자위. 다듬지 않은 거친 수염. 지난해 6개 국내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독식한 ‘추격자’의 여광(餘光)은 없었다. 하반기 개봉할 영화 ‘전우치’ 촬영에 새해 벽두부터 전력투구하고 있는 배우 김윤석(42)을 3일 오후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연말 술자리 때문에 얼굴이 안 좋으냐고요?(웃음) 전국을 누비는 ‘전우치’ 촬영에 기분 낼 짬이 없었습니다. ‘범죄의 재구성’ ‘타짜’의 최동훈 감독이랑 세 번째 같이 하는 영화인데, 액션 장면이 많아 재미있는 만큼 힘이 좀 드네요.”

범죄의 재구성에서 배경 인물로 나왔던 그가 연기파 주연배우로 발돋움하는 데 걸린 시간은 4년. 하지만 김윤석의 연기 데뷔는 198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향 부산의 극단 ‘현장’이 올린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첫 무대였다. 3분 정도 나오는 신문팔이 소년 역할이었지만 긴장해서 잘 걷지도 못했다.

1995년 장사를 하겠다며 무대를 떠났다가 2000년 돌아왔을 때, 극단 연우무대에서 함께 활동했던 송강호는 최고 배우로 자리를 굳히고 있었다. 동갑내기 친구가 연말 영화제를 휩쓰는 모습을 그는 오랫동안 TV를 통해 지켜봤다.

“질투요?(웃음) 강호 씨가 잘되는 모습은 언제 봐도 신나요. 가장 좋아하는 배우고 항상 생각하는 친구인데요. ‘연기 다시 같이 하자’고 채근하던 강호 씨가 시상식 무대에서 건네 준 상패를 손에 쥐었을 때 ‘이렇게 벅찬 순간이 살면서 몇 번이나 있겠나’ 싶었습니다.”

불혹(不惑) 뒤에 거머쥔 성공에 대해 김윤석은 “실감이 안 나고 부담도 없다”고 말했다.

“좋은 영화를 만난 덕분에 최고의 한 해를 보냈죠. 배우 혼자만의 능력으로 거둘 수 있는 성취는 없어요. 좋은 작품, 감독, 배우가 모여야 하죠. 모든 작품이 그렇게 베스트일 수 있나요. 느낌대로 편안하게 가면서 주어진 일에 집중할 뿐입니다. 그러다 보면 또 최고의 순간이 오겠죠.”

그는 인터뷰 뒤 사진 촬영에서 좀처럼 웃지 않았다. 셔터를 누를 때마다 어떻게든 웃겨 보려는 기자에게 미안한 듯 말했다.

“가식적으로 밝은 표정 짓는 걸 싫어해요. 억지웃음을 짓기보다는 무표정하게 사람들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는 게 좋아요.”

멜로드라마 주연을 맡겨도 무뚝뚝한 표정을 고집할까.

“험악해 보인다고요? 선입견 참 무섭네요. ‘타짜’ 전에 알던 사람들은 ‘당신처럼 순하게 생긴 사람이 무슨 악역을 하느냐’고 했다니까요. 김윤석이라는 배우의 독특한 ‘결’은 있죠. 하지만 그 결 위에는 어떤 캐릭터든 다 담아낼 수 있습니다.”

무대에서나 일상생활에서 한복을 거의 입어 본 적이 없는 그에게 ‘전우치’의 화담 서경덕 역할은 색다른 도전이다. ‘천하장사 마돈나’ 때 딱 한 번 경험한 와이어 액션을 거의 매회 해야 하고, 신비한 도인 화담의 캐릭터를 현대적 감각에 맞게 만들어 내야 한다.

“사료에 기록된 선비 화담과 야사 소설에 등장하는 도사 화담의 이미지가 많이 달라요. 500년의 시공을 넘나들면서 자기 정체성을 고민하는 인물로 새롭게 그려보려 하고 있습니다.”

김윤석의 2009년 첫 작품은 상반기 개봉할 코믹 스릴러 ‘거북이 달린다’. 그는 평화로운 시골 마을에 나타난 탈주범을 쫓는 어수룩한 형사로 나온다. 전우치의 화담도 주인공을 잡으러 다니는 인물. ‘추격’하는 캐릭터로 관객에게 각인될 염려는 없을까.

“멜로도 결국 남자와 여자가 서로 쫓고 쫓기는 얘기잖아요.(웃음) 쫓아야지 관계가 생기고 드라마가 이뤄지죠. 저는 배우가 빈 컵이라고 생각해요. 추격자 같은 강한 블랙커피를 비운 뒤 우유가 담길지 물이 담길지 컵은 알 수 없죠. 그저 잘 비우고 닦으며 기다리는 거예요. 촬영현장 사람들과 함께 느끼는 저릿한 ‘정점’을 기대하면서 말이에요.”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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