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지성에게 길을 묻다]오바마 당선 축시 쓴 ‘데릭 월컷’

  • 입력 2009년 1월 1일 00시 11분


젊은 ‘니그로’처럼 희망을 쟁기질하라

《2008년 11월 4일 미국 대선 직후 버락 오바마 당선인이 들고 다니던 시집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1992년 노벨 문학상 수상 시인인 데릭 월컷의 시선집이었다. 오바마의 대선 승리 다음 날 영국의 권위지인 더 타임스는 오바마 당선 의미를 노래한 월컷의 축시를 게재했다. 월컷은 카리브 해 동쪽 끝자락의 작은 섬나라인 세인트루시아 태생의 시인이다. 20세기가 낳은 대표적 서사시인이자 '서인도 제도(諸島)의 지성'으로 불리는 그는 대체 어떤 인연으로 오바마 당선 축시를 썼을까…. 호기심에 끌려 지난해 말 카리브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공항에서 시인의 집까지 가는 길은 좁고 낡았다.

제주도 3분의 1 크기 섬을 평생 벗어나 본적이 없다는 60대 택시 기사는 간선 도로가 막힐 듯하자 구불구불 동네 길로 접어들었다. 허물어질 듯한 집들 사이의 좁은 길을 질주하는 동안 길가에 퍼져 앉아 졸고 있던 개가 치일까봐 깜짝깜짝 놀란 게 대체 몇 번이었을까. 하지만 간발의 차이로 슬쩍 비켜서는 개들이나 운전하는 사람이나 서로 마음 쓰지 않는 표정이었다.

차창 밖 멀리엔 쪽빛 카리브해가 햇살을 비늘처럼 튕겨내고 있지만 발 앞엔 가난과 싸워야 하는 일상이 널브러진 현실…. 비포장길을 한참 지나 닿은 시인의 집은 카리브해를 굽어보는 언덕위에 있었다.

"평생 바다를 보며 살았다. 인간의 영혼이 휴식을 취하는 곳은 콘크리트나 고층빌딩이 아니라 자연이다. 우리는 자연에서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 아름다운 자연도 때론 한순간에 야만적인 동물로 변하기도 한다."

78세의 노시인은 먼 길을 온 방문객에게 맥주 한 잔을 건넸다. 그리곤 한 동안 바다를 보며 숨 돌릴 시간을 줬다. 오바마 당선 축시를 쓰게 된 계기부터 물었다.

"오바마와 개인적 인연은 없다. 영국 신문사에서 선거 이틀 전에 부탁을 해왔는데, 평소 그런 류의 시는 안 쓰지만, 이번 경우는 워낙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에 수락했다."

―축시 '40 에이커의 땅'에는 '동틀 녘 밀짚모자 쓴 젊은 니그로'라는 표현이 나온다. 오바마를 뜻하는 것으로 읽히는데….

"그렇다. 동틀 녘은 어둠이 가고 빛이 찾아오는 시간이다. 새로운 약속이고 새 시대의 시작이며, 선선하고 일하기 좋은 시간이다. 태양은 아직 뜨겁지 않아 쟁기질하기 좋은 시간이다. 오바마의 대통령 취임으로 새 시대를 일굴 기회가 열린다고 봤다. 그리고 '니그로'란 표현은 과거엔 인종적 편견을 담지 않은 용어였다."

그는 시에 등장하는 '쟁기질 하는 오바마' 이미지에 대해 "오바마 당선을 보면서 토마스 하트 밴톤(1889~1975·미국의 화가)의 그림에서 본 이미지가 찾아왔다. 흑인이 쟁기질하는 그림이다"라고 설명했다.

'40에이커의 땅'이란 축시 제목은 남북전쟁 이후 자유를 얻은 흑인들에게 땅을 나눠줬던 역사에서 따왔다고 말했다. 그런데 해방된 흑인에게 1가구당 40에이커와 노새를 나눠주기로 한 1865년 포고령은 링컨 대통령 암살 후 무효화됐고 땅은 압수됐다. 이후 '40에이커와 노새'란 표현은 인종적 통합의 어려움을 뜻하는 상징적 용어가 됐다.

시인은 하지만 40에이커란 제목이 비관적 전망을 담은 건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 땅은 오바마가 쟁기질 하도록 디자인된 땅이다. 쟁기질을 하면 고랑이 생긴다. 대통령의 리무진이 군중 사이로 행진하면 군중은 고랑을 사이로 밭이 갈라지듯 양 옆으로 늘어선다. 흑백, 다양한 인종이 섞여있는 대중 속으로 쟁기질 하며 들어가라는 의미다."

―'믿기 어려운 예언의 징표'라고 표현했는데.

"그렇다. 누구도 믿지 않았다. 나 역시 내가 살아있을 때 미국에서 흑인 대통령 탄생이 가능하리라고 믿지는 않았다."

―'토네이도의 검은 복수를 넘어서'라는 표현이 나온다. 오바마 시대의 개막을 화해의 시대가 열릴 신호로 기대해도 좋을까.

"토네이도는 흑인들의 분노를 뜻한다. 그것을 넘어서서 새 시대를 일굴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화이트 하우스의 블랙맨'은 매우 상징적이고 의미심장하다. 현 단계에선 통합과 화해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호소할 수 있는 최적의 인물이 흑인이다. 하지만 백악관에 흑인 가족이 있다는 걸 증오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그런 편견을 가진 사람이 있음을 알고 있다."

월콧 시인은 아버지는 영국계, 어머니는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노예의 후손이다. 혼혈이라는 점에서 오바마와 공통점이 있다. 14차례에 걸친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쟁탈전쟁과 오랜 영국 식민지 시대를 거쳐 1979년 독립한 세인트루시아는 인구 16만 명 가운데 82%가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노예의 후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간의 화해는 쉽지 않은 것 같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봐도 그렇다.

"정치현실과 역사의 리얼리티(reality·사실성)는 이율배반적일 수 있다. 일본은 지금 미국의 동맹이고 한국의 우방이다. 유대인이 당한 홀로코스트를 생각해보라. 2차 대전 후 일본과 독일은 미국의 우방이 됐고 러시아(옛 소련)는 적이 됐다. 국가간의 관계는 인간의 감정과 관계없이 변한다. 우리는 그런 변화에 아무 통제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나치 독일이 범한 홀로코스트의 기억과 분노가 여전히 마음속에 있지만 미국과 독일이 우방이 됐듯이, 악(惡·evil)이 발생했던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정치적 타협은 항상 있다."

그러면서도 시인은 이 대목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당신이 당신의 아버지와 아들이 당해야 했던 잔혹한 행위를 기억하고 여전히 분노를 갖고 있다면, 국가간에 아무리 친구가 됐다 해도 악에 대한 기억이 양해될 수 있는 건 아니다. 나치가 유대인에게 했던 악행, 미국 남북전쟁 때의 일들, 한국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그렇다. 정치의 우월성과 악의 리얼리티(사실성)를 동시에 명심해야 한다."

시인은 또 "인류가 경험해온 일들의 또 다른 차원은 '호모 호미니 루푸스(Homo Homini Lupus·'인간은 다른 인간에게 늑대다'라는 로마시대 극작가 플라우투스의 경구)에 근거해 있다"고 강조했다.

"인간은 늑대가 먹이감을 다루듯이 희생양을 다룬다. 그것이 리얼리티다. 20세기는 인류역사에서 잔혹함의 규모에 있어 최악의 세기였다. 히틀러, 스탈린, 일본제국주의, 북한의 압제…. 그런 것이 우리가 말하는 것이 악의 리얼리티다. 일본과 한국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그렇다, 그 악행이 리얼리티였다'고 인정해야 한다. 정치적으로 친구가 되는 것이 편리하다는 걸 안다는 것과 과거의 리얼리티가 서로 양해되고 타협되는 것은 아니다."

―노예제의 고통스런 역사가 새겨져 있는 흑인과 백인 사이의 진정한 화해가 가능할까. 흑인들은 백인을 용서해야 하나.

"용서는 너무 자만심에 가득 찬 단어다. 왜냐하면 흑인들도 만약 상황이 그러했다면 당시 백인처럼 악이 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아프리카의 압제자들을 보라. 동료 아프리카인을 얼마나 학대하는가. 과거 백인들이 노예를 다룬 것 보다 더 나쁜 경우도 많다. 그러므로 인간은 인종과 관계없이 악이 될 수 있는 잠재성을 갖고 있음을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

―당신은 대표작 '오메로스'에서 결국 세계는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공간이라고 강조했다. 새로운 화해와 통합의 시대가 열린다고 해도 근본적 변화는 없는 게 아닐까.

"인간은 언제나 악행을 행할 것이며, 인간은 언제나 분열되고, 인간은 언제나 내전을 벌일 것이라고 한다면, 만약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조건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정치의 영역에서 말하는 게 아니라 철학과 종교의 영역이다. 오바마 당선의 의미를 말할 때 그것은 정치의 영역에서 얘기하는 것이다."

월콧 시인은 초기 시에서 "우리에게 신에 대해 더 잘 가르쳐주는 것은 강의실이나 교회가 아니라 자연"이라고 강조했다. 과연 그는 한평생 바다를 보면서 어떤 섭리를 배우는 걸까.

"인간의 영혼 속에선 지속적인 투쟁이 진행된다. 자기 자신 속에 도사린 악을 드러내는 투쟁, 그리고 자신의 행동이 악이었음을 깨닫는 투쟁이다. 이웃을 사랑하고 좋은 일을 해야 하고, 이웃을 이해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이웃을 증오하고 흑인을, 중국인을 증오하려는 본능에 반해서 투쟁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위대한 구원을 위해선 진실을 배워야 한다. 사람들은 오해 때문에 증오한다. 세계는 아직 어리석다. 예를 들어 무슬림의 이미지는 빌딩을 폭파하려는 사람들로만 비친다. 하지만 실제로 무슬림은 매우 자비로운 종교다. 피부색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부조리한데도 많은 이들이 그렇게 해왔다."

시인은 그러면서 카리브해를 다시 가리켰다.

"나는 이 아름다운 섬과 사람들에게 평생을 매혹당했다. 카리브해의 다(多)인종 문화는 매우 위대하다. 오늘날 세계의 상황과 다르다. 그 어느 바다도 갖지 못한 다양한 문화가 살아 숨쉰다."

카스트리(세인트루시아)=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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