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된 이웃을 위하여 20선]<6>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

  • 입력 2008년 12월 17일 03시 03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무하마드 유누스 지음/세상사람들의책

《“나는 강단에서 학생들에게 모든 문제에 해답을 제공하는 경제학 이론을 가르치면서 보였던 그 열성을 기억한다. 나는 이론이 가진 아름다움이며 조화에 감탄하곤 했다. 그리고선 이 모든 이론에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길바닥에선 사람이 굶어 죽고 있는데, 도대체 경제학 이론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무담보 소액 대출의 기적

이 책은 한 가지 질문에서 출발한다. “인간이 달까지 가는 세상에 어째서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 미국 유학을 마친 수재이자 방글라데시의 치타공 대학 경제학과 교수이던 무하마드 유누스가 던진 질문이다. 1974년 치타공대 인근 조브라 마을에 몰아닥친 기아를 목격한 그는 그 어떤 경제학 이론도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는 끔찍한 현장에서는 무의미하다고 느낀다. 그렇다면 이들이 처한 현실을 이해하고 해법을 제시할 수 있는 ‘진짜 경제’란 무엇인가. 다시 학생이 되기로 마음먹고 학교를 벗어나 현장으로 뛰어든 그는 가난의 수렁에서 이들을 끌어올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소액 융자’라는 제도적 장치라는 점을 깨닫는다.

이 책은 가난한 이들에게 무담보 소액 대출의 기회를 주는 그라민은행의 설립자이자 2006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무하마드 유누스 총재의 자서전이다. 금융 전문가들이 은행 체계와 맞지 않는 그의 노력에 대해 ‘결국 헛수고가 될 것’이라고 했는데도 그라민은행은 설립 26년 뒤 1170여 개의 지점과 240만 명의 회원을 거느릴 만큼 성장했다.

은행가들은 담보 없는 융자(더욱이 가난한 사람들에게)에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원금을 되돌려 받는데도 담보가 필요하다는 건 결국 부자들한테만 융자해주기 위한 규칙이라고 생각했다. 열두 시간씩 일해도 고리대금의 덫에서 허덕이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담보 없이 융자의 기회를 준다면, 그들은 그것을 바탕으로 생업에 매진하고 원금을 갚아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실제로 그라민은행에서 대출받은 이들의 상환비율은 통념을 깨고 98%에 달한다. 세계가 기존 관행을 깬 이 새로운 은행시스템의 성과에 주목하게 됐지만, 처음부터 쉬운 과정은 아니었다.

방글라데시의 뿌리 깊은 성차별을 타파하기 위해 여성들의 경제적 자립이 중요하다고 본 그는 시골 마을을 찾아다니며 여성들을 설득했다. 돈 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극도로 꺼리는 이들에게 소액 융자의 필요성을 알리기 위해 몇 날 며칠이고 같은 곳을 찾아다녔다. 그 사이 미국 유학시절 결혼해 함께 방글라데시로 왔던 미국인 아내는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딸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갔다. 아내는 뉴저지에서 함께 살자고 했지만 그라민은행을 저버릴 수 없던 그는 이혼을 선택한다.

개인적 아픔, 주변의 비관적 전망, 그라민은행의 자회사들이 수익을 창출하고 재정적으로 튼튼해지기까지 겪어야 했던 수많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그라민 융자 프로그램은 세계 58개국에 전파됐으며 주택융자와 의료시스템 등 새로운 프로그램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책은 가난이 개인의 어리석음이나 게으름 때문이 아니라 재정 구조의 문제라는 신념과, 금융에 대한 창의적 발상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시장 경제에 적응시켜 온 한 은행가의 헌신적인 도전기다. 아울러 지식과 부가 어떻게 사회에 환원될 수 있는지도 깨닫게 해준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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