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기억하라, 최후의 인간이여… ‘로라, 시티’

  • 입력 2008년 8월 30일 02시 59분


케빈 브록마이어
케빈 브록마이어
인간의 존재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되지 않는다. 살았으되 죽은 것과 진배없거나, 죽어도 영원히 남는 이들이 있다. 인간은 기억과 관계로 살고 죽는다. 사진 제공 마음산책
인간의 존재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되지 않는다. 살았으되 죽은 것과 진배없거나, 죽어도 영원히 남는 이들이 있다. 인간은 기억과 관계로 살고 죽는다. 사진 제공 마음산책
◇ 로라, 시티/케빈 브록마이어 지음·김현우 옮김/348쪽·1만1000원·마음산책

그들은 어디선가 잠을 깬다. 생전 처음 보는, 그러나 낯설지 않은 곳. 그들의 공통점은 이미 ‘죽었다’는 것. 슬프거나 불안한 건 아니다. 생활도 실제 세상과 큰 차이는 없다. 그저 다시 돌아갈 수 없을 뿐. 여기를 사람들은 ‘시티’라 부른다. 확실한 건 하나. 지구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기억하는 동안만 그들은 시티에 머무른다.

그리고 그 세상은 지금 끝나가고 있다. 무시무시한 바이러스 때문이다. 대륙과 바다를 넘어 하루에도 수천만 명이 목숨을 잃는다. 코카콜라사 지원으로 남극탐험대에 올랐던 로라 버드. 동료들이 통신 두절을 해결하러 인근 기지로 떠난 며칠 뒤 그녀는 문득 깨닫는다. 이제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인간은 혼자뿐임을.

케빈 브록마이어는 ‘퓰리처상’ ‘내셔널 북 어워드’와 함께 미국 3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오 헨리 문학상’을 1999년부터 세 차례 받은 작가다. ‘로라, 시티’는 세 번째 작품. 연재 초기부터 영화화가 결정됐다.

소설의 ‘현세, 경계(시티), 내세’라는 구조는 아프리카 샤머니즘에서 따온 것. 많은 아프리카 부락은 인간을 ‘지상에 살아 있는 사람’ ‘사샤(sasha)’ ‘자마니(zamani)’로 분류한다.

사샤는 죽었지만 그와 함께한 이가 지상에 남은 이고, 자마니란 그를 기억하는 마지막 사람마저 죽은 이다. 소설에서 시티는 사샤가 머무는 곳이다.

지구에 살아남은 이가 로라뿐이자 시티도 변화한다. 이제 시티 주민은 모두 로라가 기억하는 이들이다. 로라의 부모, 로라의 회사 상사, 로라의 소꿉친구…. 자연스레 그들도 그녀로 인해 여기에 모였음을 알게 되고. 그 속에서 또 다른 관계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경계의 사람들과 홀로 남은 여인을 넘나드는 소설은 애잔하다. 혼자임을 받아들이되 체념하지 않고 묵묵히 남극을 건너는 로라, 시티에서 사람들에게 딸의 흔적을 찾으면서도 새로운 삶을 받아들이는 부모, 그리고 로라의 옛 애인과 그녀의 소꿉친구 사이에 생겨나는 감정. 인류가 멸망하고 세상이 무너져도 우주를 돌게 만드는 것은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 마음과 마음을 잇는 매듭이었다.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이 예정돼 있다. 세상에 하나 남은 인간의 미래, 사람들의 기억을 먹고 존재하는 도시가 더는 기억할 사람이 없어지는 순간은 쉽게 짐작할 만하다. 하지만 그게 뭐 중요할까. 지구상에 남은 동물이 펭귄밖에 없는 날이 오더라도, 사람은 사람으로 인해 존재한다. 육신을 넘어선 서로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그걸 인연 혹은 추억이라 부른다. 원제 ‘The brief history of the dead’(2005년)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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