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21년 성악가 카루소 사망

  • 입력 2008년 8월 2일 02시 56분


“20세기 성악의 시작이 엔리코 카루소였다면 마지막은 루치아노 파바로티였다.”

이런 평가에 이의를 제기하는 클래식 팬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 파바로티가 부른 ‘카루소’라는 노래가 있다. 카루소의 일생을 담고 있는데 무척이나 애절하게 들린다.

카루소의 일생은 과연 어땠을까.

카루소(1873∼1921)는 이탈리아 나폴리의 빈민가에서 7남매의 셋째로 태어났다. 창고 인부였던 카루소의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였고, 음악 교육은커녕 자녀들을 학교에 보낼 생각도 안 했다고 한다. 10세부터 공장에 나갔던 카루소는 저녁시간에 몰래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고 15세 때 비로소 정식 음악수업을 받았다.

카루소는 지휘자 빈첸초 롬바르디를 만나며 인생의 전환기를 맞게 된다.

베리스모 오페라(영웅이나 귀족이 아닌 소시민이나 하층민의 삶을 소재로 한 것)의 신봉자이던 롬바르디는 카루소에게서 참다운 베리스모의 구현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에게 많은 무대를 맡겼다. 빈민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카루소에게 베리스모 오페라는 체질적으로 잘 맞았다. 그의 가창력과 목소리도 이를 계기로 새롭게 탄생했다.

1900년 드디어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스칼라가극장 무대에 오른 카루소는 30세가 되던 1903년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무대에 선 이후 절정기를 구가했다. 출연 개런티는 ‘백지수표’에 자신이 액수를 써넣을 정도였다. 1904년에 제작된 카루소의 노래를 담은 음반은 폭발적으로 팔려 나갔다.

그렇지만 돈방석과 유명세는 불행의 시작이었다.

거액의 개런티는 카루소의 심적 부담을 가중시켰다. 카루소는 낙천적인 성격이었지만 음악에서만큼은 ‘개런티에 걸맞은 훌륭한 연주를 해야 한다’는 완벽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메트로폴리탄에서 한 시즌에 한두 편 주역을 맡은 것이 아니라 ‘하나 둘만 빼고 다 맡을 정도’였다. 이에 따른 정신적 육체적 소진으로 카루소는 너무 일찍 쓰러지게 된다. 카루소는 1920년에 공식 은퇴했지만 이미 때늦은 후였다.

그는 이듬해인 1921년 8월 2일 48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카루소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 늑막염이었다는 사실은 성악가로서 자신의 몸을 얼마나 혹사했나를 입증한다.

반면 파바로티는 철저한 자기관리로 60세가 넘어서도 왕성한 활동을 펼쳤고 2007년 향년 71세로 타계했다.

안영식 기자 ysa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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