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유형종]관객과 눈맞춘 클래식이란…

  • 입력 2008년 8월 2일 02시 56분


정치권에서 ‘소통의 부재’를 탓하는 소리가 계속 흘러나왔지만 클래식 음악계야말로 소통의 문제를 절감해야 하는 분야다. 세상은 변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까지만 하더라도 서구의 지성인 집단에서는 클래식 음악을 반드시 알아야 하는 필수적인 교양으로 받아들였고 웬만한 오페라 아리아쯤은 흥얼거릴 줄 알았다.

이제 유럽에서조차 철학 문학 역사학 등 순수 인문학이 퇴조하는 작금의 현실에서 클래식 음악만 건재하리라고 기대하기는 무리다. 더욱이 언제부턴가 우리나라에서는 청소년이 입시를 준비하는 나이가 되면 학교 수업에서 예술 과목 자체가 사라져 버리고 있다. 초등학교부터, 아니 유년기부터 대학입시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됐으니 앞으로는 미술이나 음악 교육을 받을 기회가 처음부터 봉쇄될지 모를 일이다.

게다가 현대인은 TV나 컴퓨터 전원을 켤 때마다 만나는 말초적인 문화에 익숙해졌다. 이런데도 클래식 공연장에서 전혀 딴 세상 분위기만 연출하려 한다면 관객과의 단절은 점점 더 심각해질 것이다. 예전에는 클래식의 분위기를 진정 우아하고 격조 높은 대상으로 이해했다면 지금은 이를 스노비즘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풍조도 무척 많아졌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야 하나? 퓨전 음악이나 팝페라가 답은 아닐 것이다. 다른 의도와 미적 안목을 지닌 새로운 장르이지 결코 클래식을 대중에게 쉽게 접근시키려는 시도는 아니라고 본다. 음악의 수준과 문화적인 품격은 유지하되 작곡가나 연주자의 드높은 경지를 자랑함이 아니라 청중이 잘 이해하도록 도와야 답이 나올 듯하다.

한편 연주자는 극단적인 구도자적 이미지나, 또는 정반대의 대중 스타의 모습보다는 관객과 진정으로 대화하고 마음을 나누는 모습으로 변화할 필요가 있다. 물론 모두가 그럴 필요는 없고, 그럴 수도 없겠지만 말이다.

6월 30일 서울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소프라노 임선혜의 독창회를 보고 이 문제에 대한 모범답안 하나를 만났다 싶었다. 그는 바로크 노래나 모차르트를 기대했던 청중 앞에 19세기 가곡, 그것도 절반쯤은 공연장에서 만나기 어려운 레퍼토리를 들고 나타나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었지만 곧 그런 곡이 자신이 가진 재능에 어울림을 어렵지 않게 확인시켜 주었다.

몇몇 노래가 관객에게 익숙하지 않았던 문제는 정확하게 번역한 가사를 원문과 대조하여 무대 뒤 스크린에 투사함으로써 상당 부분 해결했다. 무슨 곡인지 전혀 모르는 관객이라도 뜻과 분위기 정도는 쉽게 확인할 수 있었으리라. 연주회를 마무리할 무렵에는 관객과의 대화도 시도했다. 장황한 곡목 해설이나 자기과시가 아니라 본인은 한껏 낮추고 오늘의 자신을 만들어 준 세 스승을 한 사람씩 소개했다. 한 분은 고인이 되었기에 부인을 소개할 때는 감동적인 순간이 됐다.

노래 못지않게 아름다운 순간은 공연이 끝난 뒤 팬 사인회 시간에 만날 수 있었다. 임선혜는 놀랍게도 모든 팬을 한 사람씩 일일이 인사하며 맞이했고 사인하기에 앞서 간단한 대화를 나눴다.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줄을 서 기다린 관객들은 이렇게 정성이 담긴 사인회는 처음 경험한다는 반응이었다.

예술가란 존재가 좋은 성품을 지녔다고 일반화할 순 없다.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이 예민하거나 특이할 뿐이고, 그 때문에 더 까다롭고 대인기피증이 있는 경우도 많다. 누구나 임선혜 같은 ‘착하고 싹싹한 아가씨’ 스타일로 공연 분위기를 이끌어 가리라고 기대할 순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소통의 길을 만들어야 한다. 클래식의 엄숙한 벽을 낮추는 방향으로, 상투적으로 작곡가의 의도를 존중한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21세기를 살아가는 관객과 소통하는 방향으로 말이다.

유형종 무지크바움 대표 음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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