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노 노숙인 보면 우리사회 보이죠”

  • 입력 2008년 6월 23일 02시 57분


“(강원 정선군) 사북에 호텔 하나 지어볼까 싶어 답사차 왔다가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카지노에 갇혔습니다. 심심풀이로 하다가 한 5000만 원 잃었는데 그거 찾으려다 주식이고 집이고 다 잃었습니다. 결국 이혼하고 집에도 못 갑니다. 아이들이 우리 아빠가 최고라고 했는데….”

강원랜드 카지노에서 전 재산을 탕진한 40대 후반 남자의 사연이다. 갈 곳이 없는 그는 사북의 한 찜질방에서 생활하고 있다. 강원랜드 주변에선 이런 이들을 ‘카지노 노숙인’이라고 부른다. 찜질방 갈 돈도 없어 기차역이나 카지노 로비에서 잠을 자는 진짜 ‘노숙인’들보다는 그래도 사정이 나은 편이다.

‘카지노 노숙인’들의 삶을 추적한 연구서 ‘베팅하는 한국사회’(지식산업사)가 최근 나왔다. 저자인 김세건(43·사진)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강원 폐광지역의 사회 변동에 대한 연구차 사북을 방문했다가 카지노 때문에 ‘인생 막장’에 내몰린 사람들의 사연을 접하고 문화인류학자로서 이들의 삶을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2005년부터 3년 동안 김 교수가 제자들과 함께 카지노와 찜질방, 사우나 등지에서 만난 사람들의 사연은 구구절절하다.

“남자 친구 따라 왔다가 처음에 멋모르고 100만 원 잃었는데요. 나중에 양품점 물건 할 거까지 다 말아먹어 큰일 났어요.”(충북 청주 출신 30대 여성)

“처음엔 하루에 1000만 원도 따고 그랬지. 그 맛에 매일 몇 천만 원씩 들고 가서 잃다가 따다가 그랬는데 그걸 한 3, 4년 해 봐. 한 5억 원 정도 집어넣은 것 같아.”(서울 출신 50대 부부)

“작년에 죽으려고 했는데 돈이 없어서 못 죽었어요. 남은 돈 1800원 갖고 카지노에서 내려오는데 농약을 사려고 하니까 3000원이더라고요.”(30대 초반 남자)

전 재산을 탕진한 뒤 아예 사북으로 주소를 옮기고 택시 운전으로 생계를 꾸리는 50대 남성은 카지노에 빠진 아내를 따라왔다가 파탄 난 경우. 그는 “아내는 식당일을 해서 번 돈으로 지금도 카지노에 다닌다”면서 “더 망가질 것도 없고 해서 굳이 말리지 않는다”고 털어놨다.

김 교수는 “대부분 호기심으로 시작한 게 도박으로 바뀌고, 돈이 아니라 인생을 베팅하게 된다”고 말했다.

‘카지노 앵벌이’ ‘카지노 부부’도 이 지역의 새로운 ‘주민’으로 자리 잡았다. 근근이 끼니를 때우면서도 미련이 있어 카지노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이 ‘카지노 앵벌이’다. 이 가운데 초보 게임자에게 빌붙어서 자리를 맡아 주거나 음료수 심부름을 해 주는 일을 하면서 용돈을 챙기는 이도 있다.

카지노의 옆 자리에 앉은 여자와 정이 드는 바람에 월세를 얻어 부부처럼 지내는 정모(50) 씨처럼 ‘카지노 부부’도 적지 않다고 김 교수는 추정한다.

김 교수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카지노에 처음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호텔에서 지낸다. 그러다 돈이 떨어지면 모텔, 여관을 거쳐 찜질방과 사우나 신세를 지게 된다. 김 교수는 찜질방 단계까지 이른 사람들을 넓은 의미의 ‘카지노 노숙인’으로 분류했다. 이들은 집에 돌아가지 못하는 자신들의 신세를 빗대 스스로 ‘실향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김 교수는 사북, 고한 지역에 ‘카지노 노숙인’이 많게는 50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그는 “도박중독자의 심리학적 특징을 다루거나, 지역 개발의 사례로서 강원랜드를 연구하는 건 많지만 도박중독자의 구체적 일상과 삶에 대한 학계의 연구는 미미한 편”이라고 지적하고 “개개인의 삶을 심층적으로 재구성하고 연관지어 의미를 부여하면 그 속에서 한국사회의 단면이 나온다”고 말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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