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100년-사랑의 詩]고은/‘나무의 앞’

  • 입력 2008년 6월 19일 02시 56분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고은을 특징짓는 비평적 수사는 특유의 정력적 다작(多作), 장르 사이의 벽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형식의 다양성, 실천적 전위를 오래도록 가능케 한 행동적 에너지 등이다. 이 모든 규정은 한결같이 그를 한국문학사에서 가장 경이로운 존재 가운데 하나로 형상화해 왔다.

언젠가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누구라도 그대가 되어’(‘가을 편지’)라는 절절한 언어를 통해 대상에 대한 가없는 그리움을 토로한 그가, 이 시편에서는 ‘만남’과 ‘헤어짐’과 ‘그리움’이라는 사랑의 과정적 원리를 떠올리고 있다. ‘사람의 뒷모습’에서 마치 ‘신(神)’의 모습을 보는 듯한 경험을 하면서 화자는, 밝은 앞모습으로 만나 거룩한 뒷모습으로 헤어진 한 그루의 나무를 내내 그리워한다. 그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가 나무의 잎새를 더욱 세차게 흔들고 내년에 돋아날 잎새마저 더 눈부시게 푸르게 하는 상상이 펼쳐진다. 비록 ‘말 한마디 못하는 나무일지라도’ 화자의 사랑 고백은 ‘사람과 사람 사이/어떤 절교로도/아무도 끊어버릴 수 없는’ 사랑의 파문을 가능케 한 것이다.

고은 시편은 이처럼 ‘사람은 사람 속에서만 사람이다 세계이다’(‘만인보 서시’)라는 사람에 대한 ‘사랑’의 언어를 구축하면서, 살아 있는 뭇 생명에 대한 열렬한 연가(戀歌)로 다가온다. 그런가 하면 그의 시편은 삶 자체에 대한 찬가(讚歌)이기도 하고, 소멸해 가는 사물들에 대한 비가(悲歌)이기도 하고, 언어 자체를 넘어서는 침묵이거나 스스로를 향해 다그치는 죽비 소리가 되기도 한다. 그 아득하고 심원한 시편들이 시인의 노경(老境)에도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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