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읽는 세상]기계음… 흙내음… 난 무엇에 익숙한가

  • 입력 2008년 5월 27일 02시 58분


철걱 철커덕, 육중한 기계들이 움직이는 금속성 소리. 딸각 딸가닥, 유리병들이 생산벨트 위를 지나가는 소리. 슉 슈욱, 시뻘건 불꽃이 용광로에서 작열하는 소리…. 그곳은 들리지 않는 소리들로 가득 차 있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뻗어 있는 거미줄 같은 송전탑. 차곡차곡 쌓인 모양이 마치 색면 추상화처럼 보이는 컨테이너들. 판타지 영화 속 마법의 황금 조형물을 연상케 하는 원자력발전 설비…. 그곳에선 일상에서 접하기 힘든 장관들과 마주친다.

할리우드 세트장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채석장. 매캐한 가스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듯한 연탄공장. 1960, 70년대 다방 탁자를 위시해 모든 생활의 현장마다 놓여 있던 팔각성냥통을 떠올리게 하는 성냥공장…. 그곳엔 맨몸으로 부닥쳐야 하는 고된 삶의 현장도 있다.

사뭇 낯선, 그러면서도 왠지 친숙한 한국 산업현장의 이미지들이 어우러져 강렬한 화학반응을 빚어낸다. 강상훈 구성수 백승철 이정록 장용근. 다섯 작가는 가내공장부터 첨단산업, 부두와 공업단지까지 우리의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공장지대의 시각 이미지를 카메라에 채집했다. 서울 종로구 세종로 일민미술관은 900컷에 이르는 산업 풍경을 책으로 묶어내고 일부를 추려 8월 17일까지 ‘공장: Factory’전에서 선보인다. 기록이면서 심미적 가치를 지닌 사진들은 각기 다른 삶의 이야기를 품고 있어 울림이 크다. “급변하는 산업현장 속에서 삶의 흔적을 찾는 것, 이는 곧 우리 자신을 알아가는 또 하나의 길이기도 하다.”(김희령 큐레이터)

196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속전속결로 거쳐 온 산업 풍경 속에 우리가 집단으로 공유하는 정서와 기억이 어른거린다. 딱히 산업이라 할 것도 없던 가내수공업적 경제생산기반이 순식간에 대량화하면서 산업단지까지 일사천리로 내달은 현대 생산시스템의 현기증 나는 추억이다. 이제 사람들은 산업의 부산물에 둘러싸여 살면서도 이를 만드는 과정이나 현장과 차단되어 있다. 그저 사진 속 손때 묻은 공구들을 보며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새벽 쓰린 가슴 위로/차거운 소주를 붓는다’(박노해의 ‘노동의 새벽’)는 시를 떠올리거나, 우뚝 솟은 굴뚝들과 마주치면 ‘강 건너 공장의 굴뚝엔 시커먼 연기가 펴오르고/순이네 댕그란 굴뚝엔 작은 실오라기 펴오른다’(김민기의 ‘강변에서’)는 노래 정도를 겨우 기억해낼 뿐이다. 그렇게 사진으로 호명된 공간은 어린 시절 즐겨 먹던 땅콩캐러멜 공장부터 기계화된 도축장처럼 차갑고 섬뜩한 공간까지 현대문명의 속살을 낱낱이 드러낸다.

부서진 문설주에 햇살만 일렁이는 텅 빈 마당. 버려진 소쿠리가 먼지를 뒤집어쓴 부엌. 돌담으로 이어진 샛길. 6월 18일까지 서울 강남구 신사동 예화랑에서 열리는 이강소의 ‘A dream’전에 나온 사진은 산업화 시대 기계들의 우렁찬 합창과 대비를 이루는 아날로그 시대의 나머지 반쪽, 그 정감어린 공간을 보여준다.

한국 중국 터키 페루. 이강소가 길 위에서 만난 풍경은 영혼이 머문 흔적이 남은 듯 애틋한 노스탤지어를 환기시킨다. 고적한 침묵이 흐른다. “사람들이 시간을 두고 살던 장소에는 묘한 느낌이 드는 곳이 있다. 햇빛과 먼지 외에 공기의 흐름에 전율 같은 것이 느껴지는 공간. 그곳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그의 회화나 조각이 의도 없이 찰나적으로 완성된 것처럼 사진도 카메라의 시선과 그가 한순간 상호 작용을 통해 이뤄낸 작업이다. “같은 대상을 같은 식으로 보고 있다고 믿지만 실상 타자가 보는 세계는 우리가 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것들이다. 카메라라는 기계가 보여주는 세계는 왜곡된 생각과 잡다한 경험을 가진 사람의 시각보다는 약간 담백한 것이 아닐까. 인간은 오히려 굴절된 시선을 가지고 있다.” 세계는 항상 유동하고 아무것도 멈춰진 것은 없다고 말하는 작가. 그래서 그는 되묻는다. “사진이나 현실이나 모두 꿈과 같지 않으냐”고.

잊혀진 산업의 현장이든 떠나버린 생활의 터전이든 인간이 만들어낸 풍경에는 생 체험의 흔적이 시간의 궤적과 함께 짙게 녹아 있다. 그들을 다시 불러내는 사진들은 세상의 겉포장에 현혹된 사람들에게 이제 그 이면도 한번 돌아보라고 속삭인다.

‘백화점 마네킹 앞모습이 화려하다/저 모습 뒤편에는/무수한 시침이 꽂혀 있을 것이다/뒤편이 없다면 생의 곡선도 없을 것이다’(천양희의 ‘뒤편’)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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