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세상 풍경]<끝>조선왕조실록 CD로 만든 ‘이웅근’ 이름 잊지말자

  • 입력 2008년 5월 3일 03시 00분


국사편찬위원회가 운영하는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가 있다. 여기 들어가 검색창에 원하는 주제어를 입력하면 그것에 해당하는 내용이 시대에 관계없이 줄줄이 나온다. 인명이나 지명은 물론이고 그림 담배 무기 살인 등 약 40만 건의 주제별 검색이 가능하다.

그것을 잘 정리하면 한 권이 책이 될 정도다. 최근 들어 흥미로운 테마의 조선시대 교양서가 쏟아져 나오는 것도, 학계에서 독특한 테마의 연구 논문이 나오는 것도, 인기를 얻고 있는 사극의 대본도 이러한 디지털 데이터베이스 구축과 그 검색 기능 덕분이다.

이 시스템을 구축한 사람은 이웅근 전 동방미디어 회장. 서울대 교수로 일하던 그는 1985년 교수직을 그만두고 사업에 뛰어들었다. 한국사 사료의 한글 데이터베이스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1992년 조선왕조실록의 한글 CD 제작에 들어갔다. 2억 개의 글자를 입력해야 하는 일이었다. 주변에선 수십 년이 걸릴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연인원 10만 명을 동원해 1995년 CD를 완성했다.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검색 기능. 이 시스템이 고스란히 국사편찬위원회에 제공된 것이다.

이 전 회장은 1999년 삼국사기 CD, 2000년 고려사 CD까지 만들었다. 사람들은 이를 “혁명”이라고 했다. 영국의 동양사학자인 제임스 루이스 옥스퍼드대 교수는 “한국인들의 정신에 엄청난 충격을 가져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 예상은 적중했다.

그의 작업은 지난한 일이었다. 조선왕조실록 CD 제작에만 약 50억 원이 들어갔다. 그러나 정품 판매량은 수백 개에 불과했고 20만 개의 불법 복제품이 유통됐다. 이 전 회장은 수십억 원의 빚더미에 올랐고 1998년 부도를 맞았다. 재기에 성공했으나 2004년 또다시 부도를 맞았다.

며칠 전 동방미디어에서 일했던 삼우반출판사의 김용범 주간을 만났다. 김 주간은 “이 전 회장이 지난주 타계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충격과 함께 죄책감이 밀려왔다. 마지막으로 통화를 한 것이 지난해 초. 그때 재기를 준비하던 75세의 이 전 회장은 “디지털화해야 할 한국 사료가 아직도 많으니, 내 걱정은 말라”고 했다. “곧 찾아뵙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그의 타계 소식을 들었으니….

믿을 수가 없어 이 전 회장의 지인인 소설가이자 사극작가 신봉승 선생에게 전화를 했다. 신 선생은 “사실입니다”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2000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처음 만난 이후, 서울의 인사동 삼청동 성북동을 오가며 늘 새로운 열정을 보여주었던 이 전 회장. 더욱 안타까운 것은 신문에 부고 한 줄 나지 않고 장례가 치러졌다는 사실이다. 어렵고 난처한 상황이었기에 유족들이 그의 부고를 알리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이웅근’이라는 이름이 이렇게 잊혀질 수는 없다. 역사를 공부한 사람들, 역사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특히 그의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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