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그를 사로잡은 악령은 돈…‘죄와 벌’을 낳은 것은 빚

  • 입력 2008년 3월 22일 03시 00분


◇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석영중 지음/344쪽·1만3000원·예담

“그는 내가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었던 단 한 사람의 심리학자였다. 그는 내 생애에서 가장 아름다운 행운 가운데 하나다.”(프리드리히 니체)

“그는 어느 과학자보다도, 위대한 가우스보다도 많은 것을 나에게 줬다.”(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1821∼1881).

그를 설명하는 데 많은 수식어는 필요 없다. 러시아 대문호, 영혼의 선견자? 이름 하나면 충분하다. 도스토옙스키. 그 자체로 빛난다.

하지만 그만큼 부담스럽기도 하다. 국내에 나와 있는 도스토옙스키 전집(열린책들)을 보자. ‘죄와 벌’만 해도 빽빽한 글자에 그림도 없다. 500쪽이 넘는데 2권이나 된다. 저자가 책에서 쓴 대로 “무슨 ‘…스키’만 봐도 정나미가 떨어진다.”

그런데 이 대단한 작가가 돈 때문에 글을 썼단다. “셰익스피어에 버금간다”(지크문트 프로이트)는 인류의 지성이 속물적인 돈 때문에? 여기서 저자의 전복적인 상상이 시작된다.

저자의 말을 들어보자.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부터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까지 돈 얘기가 빠지질 않습니다. 돈 때문에 싸우고, 돈 때문에 절망하고, 돈 때문에 죽이죠. 정치사회소설로 평가받는 ‘악령’마저 부의 재분배에 관한 얘기입니다. 심지어 ‘카라마조프…’에는 ‘3000루블’이 정확히 191번 언급될 정도죠.”

도스토옙스키가 쓴 거의 모든 소설의 중심 소재가 돈인 까닭은 뭘까. 그건 그에게 돈이 단순한 도구 이상의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었다. ‘돈이 없으면 자유도 없다’고 했던 푸시킨보다 한 발 더 나아간다. “돈은 주조된 자유다.”(‘죽음의 집의 기록’ 중에서) 돈은 곧 자유이자 행복이었다. 아니, 돈은 모든 것이었다.

‘가난이 죄가 아니라는 말은 진실입니다. 그러나 빌어먹어야 할 정도의 가난은, 그런 극빈은 죄악입니다. 누군가 극빈 상태에 이르면 그를 몽둥이로도 쫓아내지 않습니다. 아예 빗자루로 인간이라는 무리에서 쓸어 내버리지요.(…) 극빈 상태에 이르면 자기가 먼저 자신을 모욕하려 들죠.’(‘죄와 벌’ 중에서)

이는 도스토옙스키의 삶 자체가 돈을 떼놓고 얘기할 수 없는 이유였다. 그는 도대체 돈을 간수할 줄 몰랐다. 펑펑 써대고 전방위로 빚을 졌다. 동시대 문호였던 투르게네프에게도 돈을 꿨다.(이 때문에 둘은 견원지간이 된다.) 도박은 어찌나 좋아하는지. 룰렛으로 여행경비를 날리고 호텔방에 갇혔던 적도 있다.

호기롭기도 그지없었다. 죽은 형의 빚이란 빚은 다 껴안았다. 증서도 없이 돈을 달라는데도 다 들어줬다. 형수와 조카가 요구하는 돈도 다 해줬다. 죽은 둘째 아내의 망나니 아들도 보살폈다. 평생 빈털터리. 사망하기 1년쯤 전에야 겨우 빚을 다 갚았다.

저자가 봤을 때 이 곤궁함이야말로 도스토옙스키의 힘이었다. “흔히 얘기하는 ‘헝그리 정신’과는 결이 다릅니다. 스스로 절박했기에 자본의 속성을 꿰뚫어 본 거죠. 돈으로 흥하고 망하는 인간 심리를 누구보다 잘 이해했던 겁니다. 그 속에서 작가는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에 다가갔기에 지금도 공감할 만한 보편성을 획득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도스토옙스키는 돈을 잘 이해했다. 돈을 읽었고, ‘절실히 아주 절실히’ 돈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돈을 사랑하거나 아낀 건 아니었다. 돈이 없었기에 불행했을까. 전문가들에 따르면 그는 소소한 돈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지만 편안하게 죽음을 맞았다. 부귀영화를 누렸던 톨스토이의 고통에 찬 임종과는 달리.

‘도스토예프스키…’는 매력적인 책이다. 참신한 시각, 문장도 에두르지 않고 편안하다.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인 저자가 학생과의 수업에서 ‘어떻게 하면 고전을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까’ 하고 고민했기 때문이다. 책을 읽다 보면 미처 읽지 못했던 도스토옙스키의 고전을 찾아 읽고 싶어진다.

“이 책은 도스토옙스키의 절반쯤에 해당합니다. 돈은 그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죠. 하지만 또 다른 한 축에 해당하는 ‘구원’이 있습니다. 다음 책은 그 나머지 반을 소개하려 합니다. 도스토옙스키는 그만한 가치가 있거든요.”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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