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세상 풍경]비매품 책을 펼치면 나눔의 기쁨이 번진다

  • 입력 2008년 3월 22일 03시 00분


25, 26일 서울의 서울옥션과 K옥션에서 올해 첫 미술품 메이저 경매가 열린다. 박수근 김환기 이중섭 장욱진 등 작고 화가와 이우환 천경자 씨 등 인기 화가의 작품들이 대거 나온다고 한다. 이들 작품은 과연 얼마에 팔릴 것인지, 지난해 말 가라앉았던 미술시장이 다시 호황을 누릴 수 있을 것인지 자못 궁금하다.

이들 홍보 사이트엔 천경자 씨의 작품이 메인으로 등장했다. 천 씨 작품에 대한 기대를 반영한 것이리라. 그런데 천 씨 하면 생각나는 일이 있다.

지난해 말, 소포가 하나 배달됐다. 상자를 열어 보니 천 씨의 도록이 들어 있었다. 모두 열 권. 출판사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고 책 표지를 열어 보니 비매품이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왜 비매품 도록을 열 권씩이나 보냈을까, 잘못 배달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록을 편집한 디자인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그곳의 직원은 이렇게 말했다.

“천경자 선생님께서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도록을 만들어 돌리시는 거예요. 천 선생님이 직접 모르시더라도 답례하는 의미에서 비매품으로 만드셨습니다. 모르는 분께 전달하려면 신문사 문화부를 통하는 게 가장 나을 듯싶어 보내 드렸습니다.”

비매품은 팔지 않는 책이다. 정확히 말해 무료로 지인 등에게 나눠 줄 목적으로 만든 책이다. 기관이나 단체에서 홍보용이 많다.

비매품 가운데 즐겨 보는 책은 삼성문화재단에서 만드는 계간지 ‘문화와 나’다. 전통 문화와 역사의 향기가 가득한, 매력적인 잡지다.

언젠가 ‘문화와 나’ 관계자에게 “유가(有價)로 바꿔 서점에서 팔면 어떻겠느냐. 더 많은 사람에게 책을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겠느냐”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자 그 관계자는 “비매품의 원칙은 버릴 수 없다”고 답했다. 문화재단의 비매의 원칙엔 이해가 간다. 하지만 서점에서 사 볼 수 없다는 점은 여전히 아쉽다.

헌책방 관련 책을 많이 낸 최종규 씨도 비매품을 좋아한다. 최 씨는 아동문학가 이오덕 선생이 타계한 이듬해인 2003년 고인의 유고를 모아 ‘어린이를 지키는 문학’ 등 여러 책을 냈다. 최 씨는 유통비를 없애 책값을 저렴하게 매긴 뒤 원하는 사람에게 보내 주기도 하고 헌책방에 공급해 싼값에 사 볼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상당 부분은 공짜로 주었으니 비매품이나 마찬가지였다. 저렴한 비용으로 양질의 책을 만들어 많은 사람이 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최 씨는 “비매품의 의미는 나눔”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비매품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다.

천경자 도록을 다시 한 번 열어 봤다. 어디선가 누군가도 이 비매품 책을 보며 예술의 향기에 취할 것이라 생각하니, 참 기분 좋은 봄날이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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