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삶은 이분법으로 건너갈 수 없다”…‘황금노트북’

  • 입력 2007년 10월 27일 02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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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노트북(전 3권)/도리스 레싱 지음·안재연 이은정 옮김/1권 492쪽, 2권 468쪽, 3권 324쪽/1, 2권 각 1만3000원, 3권 1만2000원·뿔

“문제는, 내가 보기에 모든 게 무너지고 있다는 거야.”

이 방대한 소설은 주인공 안나 울프의 암울한 대사로 시작한다. 올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영국 소설가 도리스 레싱(88)의 대표작 ‘황금노트북’. 1962년 발표돼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이 작품을 스웨덴 한림원이 거의 반세기 만에 인정한 셈이다.

그도 그럴 것이 워낙 논란이 많은 작품이었다. 레싱은 발표 10년 뒤에 쓴 서문에서 신경질적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평론가들이 이 책을 우호적이거나 적대적이거나 가릴 것 없이 즉시 성(性) 전쟁에서 유용한 무기라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레싱이 전달하려던 주제는 다른 곳에, 소설의 첫 대사에 담겨 있다. ‘모든 게 무너지고 있다’는 것. 레싱은 자기 안의 이분법을 무너뜨리고자, 그래서 자신을 치유하고자 했다고 털어놓는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소설을 ‘여성 대 남성’의 확실한 이분법으로 쟀다는 것은 아이로니컬한 일이다. 이 책은 1990년대 중반 다른 출판사가 국내에 번역 소개했지만 절판된 뒤 노벨 문학상 수상을 즈음해 다시 출간됐다.

백인 남성과 흑인 여성의 사랑을 그린 소설이 히트해 명성을 얻은 안나는 어린 딸과 함께 살고 있다(레싱이 이혼한 뒤 어린 아들과 지낼 무렵 첫 소설 ‘풀잎은 노래한다’가 큰 성공을 거두었던 것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다). 레싱은 ‘자유로운 여자들’이라는 제목의 장(章)에서 안나와 친구인 몰리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동안 (부인) 매리언은 꼼짝없이 자식들한테 손발이 묶여 있었어”라고 몰리가 전 남편 리처드에게 외친다든지, “당신 둘은 결혼하지 말았어야 해요. 아니면 적어도 아이는 낳지 말았어야 해요”라고 안나가 몰리와 리처드에게 냉정하게 지적하는 모습 등은 확실히 1960년대 초반 페미니스트들이 열광했을 법한 장면이다.

그렇지만 이야기는 단순하지 않다. ‘자유로운 여자들’은 다섯 장(章)에 걸쳐 전개되는데 장마다 ‘검은 노트’ ‘빨간 노트’ ‘노란 노트’ ‘파란 노트’가 뒤따른다. ‘검은 노트’는 백인과 흑인 원주민의 갈등이, ‘빨간 노트’에는 공산주의에 대한 환멸이 담겨 있다. ‘노란 노트’는 안나가 쓰는 소설로 엘라와 폴이라는 남녀 주인공이 나오며, ‘파란 노트’는 안나의 솔직한 심정을 적은 일기다. ‘자유로운 여자들’의 네 번째 장에는 이 노트들에다가 ‘황금 노트’가 더해지는데, 안나가 새 애인 숄을 통해 상처에 대한 화해를 꿈꾸는 내용이다.

아프리카에서 보낸 유년 시절, 젊은 날의 공산당 활동 등 작가의 자전적 체험이 짙게 배어 있는 이 소설은, ‘구속과 해방’을 부르짖는 안나만 부각됐던 게 사실이지만, 실은 찬찬히 읽다 보면 문장 곳곳에서 인종과 성별, 이념의 이분법에 대한 환멸을 발견할 수 있다. 레싱은 안나를 통해 그때껏 살아온 삶에 대한 ‘붕괴’를 선언하고 가파른 대결구도를 넘어서서 화해를 시도하는 것이다. 작가는 ‘노란 노트’에서 폴과 헤어진 엘라의 육성을 통해 “자신들의 한계를 의식적으로 뛰어넘으려는 시도로 인해 둘 다 산산조각이 나지. 그리고 혼란으로부터 솟아나오는 새로운 힘”이라고 솔직하게 주제를 표현한다.

다양한 이야기와 사유가 교차 편집된 실험적인 형식이어서 읽다 보면 혼란스러운 독자도 있을 듯싶다. ‘자유로운 여자들’ 부분만 따로, ‘검은 노트’ 부분만 따로 읽는 식의 독법도 권할 만하다. 전 3권 중 2권까지 나왔으며 3권은 30일 출간된다. 원제 ‘Golden Notebook’.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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