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저작권료가 괴로워”

  • 입력 2007년 10월 18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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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올드보이’, 드라마 ‘하얀거탑’ 그리고 최근 베스트셀러 ‘파피용’의 공통점은? 모두 외국 원작이란 점이다. 이 작품들은 각기 일본 만화와 소설, 프랑스 소설이 원작이다. 책의 경우 번역으로 원작을 옮길 뿐이지만 해외 판권을 사들여 ‘국산화’하는 점에선 같다. 즉, 해외 콘텐츠라는 원재료로 한국 문화상품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외국에서 들여오는 콘텐츠의 저작권료가 치솟고 있다. 1∼2년에 몇 배가 뛰었다. 갈수록 경쟁이 심해져 가격 상승을 더욱 부채질한다.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해외 의존도가 심해져 자생적 문화 콘텐츠의 토양마저 멍들고 있다.”(김선식 다산북스 대표) 어느 특정 분야의 얘기가 아니다. 영화 출판 드라마 등 문화 전방위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해외 콘텐츠 저작권료의 금(金)값 시대.’ 그 현실을 짚어 본다.》

○ 영화, 일본 콘텐츠에 억대 저작권료도 지불해

‘올드보이’로 가능성을 보여 준 일본 원작의 영화화는 최근 절정에 이르렀다. 작년에 대박을 낸 ‘미녀는 괴로워’를 비롯해 최근 몇 개월만 봐도 ‘검은 집’, ‘권순분 여사 납치사건’, 18일 개봉하는 ‘어깨 너머의 연인’과 ‘바르게 살자’까지 일본 만화나 소설이 원작이다.

이러다 보니 영화계에는 일본 소설과 만화의 판권 구입을 위한 전쟁이 벌어졌다. 2, 3년 전엔 에쿠니 가오리류의 연애소설이 주류였다면 최근에는 다양한 장르의 소설이 인기를 끈다. 미스터리 추리 작가인 히가시노 게이고나 현대사회를 통렬히 풍자하는 오쿠다 히데오 등의 작품이 상한가다.

히가시노의 작품은 일본에서도 대부분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져 충분히 검증을 거쳤기 때문에 국내에서도 통할 수 있다는 게 영화계의 판단. 오쿠다의 ‘공중그네’는 영화와 드라마 제작이 동시에 추진될 정도다.

출판사 ‘현대문학’의 김영정 실장은 “2005년 출간된 히가시노의 ‘용의자 X의 헌신’은 출간 한 달이 지나고 연락이 왔는데, 올해 ‘붉은 손가락’은 나오자마자 10여 군데 영화사와 방송국에서 구입을 희망했다”고 말했다.

콘텐츠 저작권료는 해당 영화사의 비밀. ‘올드보이’는 2000만 원이었지만 현재 해외 A급 작가의 작품은 평균 5000만 원이 넘고 억대에 이른 작품도 있다는 것. 여기에 원작 각색 비용이 들어 지출은 더 늘어난다. 잘나가는 국내 시나리오 작가가 4000만∼5000만 원 선을 받는 걸 감안하면 엄청난 액수다.

한 영화계 인사는 “최근 한국 영화사들이 한꺼번에 달려드니까 일본 쪽도 기획안을 요구하고 이리저리 재 보는 등 까다로워졌다”고 전했다.

○ 드라마, 검증된 원작은 방영 불확실해도 경쟁

드라마의 저작권료도 영화계 못지않다. 국내 A급 원작으로 통하는 고우영 화백의 ‘일지매’는 4년 전 2000만 원 선에 거래됐다. 그러나 “최근 일본 만화는 최소 4000만 원이며, A급 작품은 8000만 원 이상으로 프리미엄이 붙었다.”(박창식 김종학프로덕션 제작이사)

이처럼 가격이 뛴 것은 국내 시장에 좋은 원작이 부족하다는 방증이다. 제작사들이 좋은 원작을 확보하고 싶은 건 당연한 일. 특히 원작이 탄탄하면 사전제작도 가능해 제작 환경에 숨통이 트인다. 이른바 날마다 대본이 나오는 ‘쪽대본’도 필요 없다. 이 때문에 박 이사는 “제작사는 방영이 불확실해도 좋은 원작을 미리 확보하려는 심산에 경쟁에 뛰어든다”고 말했다.

최근엔 한발 나아가 해외에서 드라마로 만들어진 원작을 선호하고 있다. 색다른 소재를 다룰수록 ‘검증’ 욕구는 더 크다. ‘봄날’ ‘하얀거탑’ 등이 좋은 사례. 정운현 MBC 드라마국장은 “시청자의 눈은 높아졌는데 공급은 한정돼 벌어지는 현상”이라며 “특히 TV와 영화가 해외 원작을 두고 함께 경쟁하면서 더 치열해졌다”고 말했다.

방송이나 영화계 모두 특히 일본 원작에 매달리는 이유는 뭘까. 비슷한 동양문화권이면서도 장르나 소재가 훨씬 다양하기 때문이다. 정 국장은 “최근 드라마나 영화의 주 관객층이 일본 드라마나 만화에 익숙한 1960년대 이후 세대로 바뀐 것도 하나의 이유”라고 말했다.

○ 출판, 상업성 있는 콘텐츠에 몰려 시장 불안정

출판계의 가격 경쟁은 더욱 심각하다. 익명을 요구한 A출판사 대표의 얘기를 들어보자. A사는 엄청나게 높은 저작권료 탓에 맘에 뒀던 자기계발서 판권을 포기했다.

“출판에이전시와 거래 성사 직전이었습니다. 그리 주목받는 책이 아니어서 1000만 원 선에 합의했죠. 근데 한 대형 출판사가 뛰어들었어요. 다된 밥 놓치기 싫어 경쟁이 붙었습니다. 한 4000만 원쯤 올랐나…. 더 갔다간 따내도 손해보겠더라고요.”

이런 사례가 특이한 경우도 아니다. 2, 3년 전만 해도 300만∼400만 원이던 최저가가 요즘엔 보통 1000만 원 내외에서 시작한다. A급 인기 저작물은 이미 지난해부터 10만 달러(약 9000만 원) 시대를 맞았다. 올해도 ‘에너지버스’나 앨런 그리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의 회고록 등은 20만 달러에 육박했다는 게 업계의 얘기다.

한국의 과열 경쟁은 이웃 국가에도 영향을 끼친다. 콘텐츠가 풍부한 영미 출판사들이 일본이나 중국에 기존보다 높은 저작권료를 요구한다는 웃지 못할 소식도 있다. 한국의 사례에 비춰 시장 규모가 더 크니 당연하다는 논리다.

저작권료의 가격 상승은 소비자에게도 도움이 안 된다. 출판사 ‘미래의창’ 성의현 대표는 “저작권료가 오르면 전체 비용에 여유가 없어 이전에 상업성이 없어도 구입했던 의미 있는 콘텐츠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며 답답해했다.

한국출판인회의 한성봉 대외협력위원장은 “자본주의 시장에서 경쟁은 불가피하지만 서로에게 생채기를 내는 경쟁은 자제해야 한다”며 “해외 판권 경쟁에 소모되는 비용을 국내 콘텐츠를 키우는 데 돌림으로써 장기적인 시장 안정화를 꾀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채지영 기자 yourcat@donga.com

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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