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가는 책의 향기]‘다름’ 인정하고 나면 서로 닮아가지

  • 입력 2007년 7월 28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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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 하지현 정신과 전문의 ‘당신의 속마음’ 저자

To: 사는 게 지겹고 짜증만 난다는 결혼 10년차 J

며칠 전 네 전화를 받고 반가웠다. 대학 다닐 때 밤새워 술 마시며 붙어 다니다 결혼 뒤 왕래가 뜸해졌지. 술 한잔 마시면서 밀린 숙제 하듯 사는 얘기를 하는데 뭔가 겉도는 것 같더라. 우리 둘 다 점점 불콰해지기 시작했지만 너와 나 사이의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은 줄어들지 않았지. 결국 내가 먼저 “두 사람 사이 괜찮니?” 하고 직격탄을 날릴 수밖에 없었다.

한 템포 뜸을 들이고 소주 한 잔 넘기자 다섯 살이 되어서야 말을 하기 시작한 아이같이 말문이 트여 폭포수처럼 쏟아지더구나. 아이 키우기의 버거움, 무한경쟁 속에서 실력보다 네트워크로 평가받아야 하는 불공평에 대한 얘기 등. 하지만 너희 부부 사이 문제가 핵심이더군. 서로를 이해할 수 없고, 이제는 포기한 지 오래되어 지쳤다는 그런 얘기 말이야. 솔직히 네가 전화할 때부터 감을 잡고 있었다. 몇 년 동안 연락 없던 친구의 전화는 이런 유의 은밀한 상담 신청이라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거든. 하지만 감정이 격해진 네게 뾰족한 대답을 그 자리에서는 할 수 없었어. 남은 시간 묵묵히 들으며 술잔을 부딪치는 수밖에.

그래서 이렇게 네게 편지를 쓴다. 프로이트는 성인기의 발달과제는 ‘일과 사랑’이라고 했지. 사회적 정체성을 확고히 하기 위해 자신의 직업을 확고히 하고 그 자리에서 인정받는 것이 ‘일’의 문제야. 사랑은 가족이 아닌 타인과 한지붕 아래서 가족만큼 친밀하게 가까운 관계를 만들어 가고, 더 나아가 아이를 낳고 ‘부모 되기’라는 어려운 미션을 수행하는 것이지. 이 편지에 한 번의 풀이를 보여 주는 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아. 결국 네 문제는 네가 풀어야 할 일이거든. 그래도 참고서가 도움은 되겠지.

먼저 권할 책은 김혜남의 ‘어른으로 산다는 것’(갤리온)이야. 어른으로 살아가는 게 두려운 많은 피터팬을 위한 책이지. 결혼한 이유는 외롭기 때문 아니니? 부대낌의 불편함이 싫으면 혼자 사는 길밖에 없지. 그런 삶의 외로움은 닉 혼비의 ‘어바웃 어 보이’에 잘 그려져 있어. 자신만의 섬에서 살면서 땅으로 나오지 않으려는 사람의 원초적 외로움 말이야. 너 그날 아내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하소연하더라. 아내도 마찬가지일 거야. 그런데 말야. 이해한다는 말은 사실은 네 잣대로 평가하려는 것 아니야? 서로 다를 뿐이지, 누가 옳고 그른 것은 아니거든. 그건 작은 차이 같아 보이지만 결정적인 것이야.

정말 좋아한다면 박현욱의 소설 ‘아내가 결혼했다’(문이당)에서와 같은 상황조차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지배 욕구와 일심동체의 환상을 포기하고, 각자의 존재감을 존중할 때 숨통이 트일 수 있을 거야. 차이를 받아들이는 순간 신기하게 점차 둘은 닮아 간다는 아이로니컬한 일이 일어나지.

만화가 이우일의 ‘옥수수 빵파랑’(마음산책)과 그의 부인 선현경이 그린 ‘선현경의 가족관찰기’(뜨인돌)를 함께 읽어 봐. 집 안의 같은 물건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묘한 공통점과 개성 어린 다른 시선을 느낄 수 있을 거야. 부부란 그런 것이 아닐까?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상대라는 거울에 반사된 내 미숙함을 키우고 각진 부분을 다듬어 가는 것.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수신제가도 못하는 주제에 말이 길었다. 다음에 만나면 내 하소연 좀 들어다오. 나도 고민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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