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아버지’가 무너졌다

  • 입력 2007년 6월 22일 02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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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금기이고 규율이었으며, 그래서 저항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던 ‘아버지’. 한국문학사에서 ‘아버지’는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아버지가 요즘 젊은 작가들에겐 다른 의미다. 김애란(27) 씨가 ‘아버지가 없는 아이라고 해서 특별히 나쁠 것도 다를 것도 없는 일상이었다’(‘달려라 아비’)고 썼듯, 최근 한국소설에서 ‘아버지’의 무게는 확 줄었다.》

평론가 손정수 씨가 계간 문예중앙 여름호에 기고한 ‘오이디푸스 극장’에 따르면 우리 문학이 갖고 있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2000년대 이후 새롭게 바뀐다. 서정주 시인은 ‘애비는 종이었다’(‘자화상’에서)고 식민지 시대의 정체성 문제를 드러냈고, 이문열 씨의 ‘남로당 아버지’는 분단 이데올로기 시대를 대표했으며, 1990년대 장정일 씨가 장편 ‘내게 거짓말을 해봐’에서 ‘신버지’(신격화한 아버지)를 무너뜨리려고 온 힘을 다했던 게 그간의 ‘아버지들의 변천사’다. 평론가 서경석 씨는 “아버지의 존재를 둘러싼 서사가 우리 소설에 절대적인 우위를 점해 왔다”고 말한다.

가부장으로서 봉건시대를 지나 근대 이후 그 위엄이 많이 약화되긴 했지만 아버지의 억압은 여전히 존재했던 게 사실. 그렇지만 1990년대 후반 이후의 우리 사회에서 아버지는 억압적 존재가 아니다. 이를 두고 김정현 씨는 소설 ‘아버지’(1996년)에서 가장으로서의 위상이 추락하는 아버지를 안타깝게 여기기도 했지만, 요즘 소설에선 그런 안타까움마저 찾아볼 수 없다.

특히 ‘아버지’의 자리에 다른 것들을 놓는 게 젊은 작가들의 경향이다. 아버지가 현실의 무게를 가지고 삶을 끌어당기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돼 버리는 것이다. 한유주(25) 씨의 단편 ‘K에게’에서 화자는 자신의 존재와 연관된 질문이 떠오를 때마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아닌 ‘백과사전’을 찾는다. 김애란 씨의 ‘달려라 아비’에서 처음부터 아버지가 없는 화자는 그 문제를 고민하는 대신 ‘반짝이는 야광바지를 입고 달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려보면서 상상의 날개를 펼친다. 이문열 씨가 소설 ‘영웅시대’ 등에서 부재하는 남로당 아버지를 커다란 상처이자 부정해야 할 대상으로 여긴 데 대해 김애란 씨는 “아버지가 나에게 금기는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자주 언급되지 않았을 뿐”이라고 담담하게 말해 버린다.

심지어 박민규(39) 씨는 단편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에서 사라져 버린 아버지가 기린이 돼서 돌아온다는 극단적 설정을 내놓는다. ‘아버지’가 이젠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의미 없는 동물 같은 대상’이 돼 버렸다는 것이다. 박 씨는 한발 더 나아가 단편 ‘깊’에서 아버지가 아예 없는 미래사회를 그려놓았다.

새로운 소설은 달라진 사회 현실을 반영한다. 아버지가 위엄 있는 존재가 아니라 친구 같은 대상이 되면서, 소설에서도 이제 삶의 의미를 증명하기 위해 꼭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손정수 씨는 “새로운 형태의 오이디푸스 구조들은 ‘아버지의 이름’이 약화된 현실로부터 생산된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현실을 드러내는 소설적 징후들”이라고 설명했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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