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49년 군용 담배 ‘화랑’ 보급

  • 입력 2007년 6월 15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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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거진 수풀을 헤치면서 앞으로 앞으로/추풍령아 잘 있거라 우리는 돌진한다/달빛 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어 먹던/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로 시작되는 유명한 군가 ‘전우야 잘 자라’의 2절이다. 6·25전쟁 중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한 뒤 38선을 넘어 북진할 때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 군가에 등장하는 ‘화랑담배’는 1949년 4월에 국군 창설을 기념해 발매됐고 같은 해 6월 15일 사병들에게 보급되기 시작했다.

문화인류학자들은 약초로 쓰이던 담배를 기호품으로 운명을 바꿔 놓은 것은 연기(煙氣)였다고 진단한다. 피어오르는 연기가 담배에 대한 흥미를 이끌어 냈다는 것이다.

군가 속 ‘화랑담배 연기’는 단순한 연기가 아니었을 것이다. 전장의 포연(砲煙)이자 민족의 깊은 한숨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담배는 한국 현대사의 희로애락이 담긴 아이콘 중 하나였다.

광복 후 처음 세상에 나온 ‘승리’(1945년 발매)는 민족 해방의 기쁨을 표현했다. 6·25전쟁 도중에 태어난 ‘건설’(1951년)은 ‘전방은 진격, 후방은 건설’이란 구호에서 유래했다. 폐허가 된 조국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의지가 담겼다.

전후(戰後) 첫 제품인 ‘파랑새’(1955년)는 희망과 의욕을 불어넣기 위한 것이었다. 파랑새와 동갑내기인 ‘풍년초’는 역설적으로 당시 보릿고개의 배고픔을 상징한다.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 군사정권 시절에는 정치적 구호가 담배 이름이 됐다. 재건(1961년), 새마을(1966년), 충성(1976년), 협동(1977년) 등이 대표적이었다.

1972년 유신 선포 이후에는 화랑 담뱃갑에 ‘유신 과업 수행에 앞장서자/멸공방첩’이란 표어가 등장하기도 했다.

한국민에게 가장 사랑 받은 담배는 ‘솔’(1980년)이었다. 한민족을 상징하는 푸른 소나무처럼….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담배 시장이 개방되면서 담배 이름에 외국물이 짙게 들기 시작했다.

88디럭스마일드(1990년), 디스(1994년), 오마샤리프(1995년), 에쎄(1996년), 리치(1999년), 타임(2000년), 레종(2002년), 더원(2003년), 비전(2004년) 등등.

국적 불명의 이 담배들은 우리 시대의 무엇을 상징하는 아이콘일까.

부형권 기자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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