넝쿨처럼 마냥 뻗어가는 삶…詩…‘도장골 시편’펴낸 김신용 시인

  • 입력 2007년 4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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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가변성을 부정하는 삶치고 온전한 삶이 없더이다.” 새 시집 ‘도장골 시편’을 낸 김신용 시인. 신원건 기자
“생의 가변성을 부정하는 삶치고 온전한 삶이 없더이다.” 새 시집 ‘도장골 시편’을 낸 김신용 시인. 신원건 기자
‘밭둔덕의 부드러운 풀 위에 얹어 놓을 수도 있을 텐데/하필이면 가파른 언덕 위의 가지에 아슬아슬 매달아 놓았을까? 저 호박의 넝쿨/그러나 넝쿨은 그곳에 길이 있었기에 걸어갔을 것이다/낭떠러지든 허구렁이든 다만 길이 있었기에 뻗어갔을 것이다.’(‘넝쿨의 힘’에서)

하필이면 그의 삶은 그렇게 흘러갔을까? 10대에 홀로 상경했을 때부터 김신용(62) 씨의 등에는 가난이 들러붙어 있었다. 배고픔을 무마하기 위해 안 해 본 손일이 없었다. 어떤 얼굴 하얀 사람들은 노동을 신성하다 하지만 먹고살기 위해 노동밖에 할 수 없는 사람에겐 그런 얘기를 귀담아들을 새도 없다. 살아온 이력만으로도 소설 몇 권을 쓰고 남았을 테지만 김 씨는 시인이 됐다. “다만 길이 있었기에 뻗어 갔을 것이다.”

그가 새 시집 ‘도장골 시편’(천년의시작)을 냈다. 시집에 실린 ‘넝쿨의 힘’이 올 초 ‘문인들이 뽑은 가장 좋은 시’로 선정됐다. 지난해 말 노작문학상을 수상한 ‘민달팽이’도 만날 수 있다. 작품들이 일찌감치 조명을 받아 시집 출간을 기다린 독자가 적지 않다.

새 시집은 충북 충주의 산골마을인 도장(桃牆)골에서 쓴 연작시 50여 편으로 묶였다. 5년 동안 수의를 만들어 모은 돈으로 도장골에 들어가서 마음 다잡고 쓴 시다. 19일 만난 시인은 “매일 오전 4시에 일어나 대여섯 시간을 내리 시만 썼다”고 했다. ‘오전엔 밭일, 오후엔 독서, 해 저물면 취침’ 하는 규칙적인 생활을 꼬박 1년을 했다.

‘섬의 빈집에 처음 몸을 풀었을 때, 마당에 핀 이 접시꽃을 보며 땅에 떨어지면 산산이 깨어지는 접시, 사기로 만든 접시일 뿐이라고 생각했었다.’(‘접시꽃이 피었다’에서) 떠돌이 노동자 시인은 그렇게 냉소적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이 따뜻하게 풀렸다. 천장에서 반딧불이를 처음 본 어느 날엔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새벽에 가득한 안개를 보고는 ‘안개가/나뭇잎에 몸을 부빈다/몸을 부빌 때마다 나뭇잎에는 물방울들이 맺힌다’(‘부빈다는 것’에서)는 절실한 시구를 만들어 냈다.

서정시로 따지자면 그보다 훨씬 아름답게 시어를 구사한 작품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의 시에 감동한다. “자연에서 인간의 삶을 끌어내서가 아닐까?” 시인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시 ‘蛙禪(와선)’에 답이 있다. ‘청개구리는 자신의 숨기고 싶은 부분까지 온통 내비치며/미끄러운 유리의 面(면)에 달라붙어,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수직의 콘크리트 담벽에도 발자국 찍는 담쟁이 넝쿨의 작은 발들처럼//온통 날것으로 달겨드는, 그 아슬아슬한 생에의 微動(미동)-.’ 그는 유리창에 붙은 청개구리의 모습에서 아등바등 사는 인간을 봤다. 가파르게 매달린 채 뻗어 나가는 호박 넝쿨에서,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 없지만 계속 나아가는 인생을 봤다. 도시에서 나고 구른 시인이 자연을 바라보는 눈은, 그의 시를 읽는 절대 다수의 도시 사람들 눈높이와 같다.

시인은 1년 전 도장골을 떠나 경기 시흥의 소래벌판으로 옮겨 왔다. 그는 그곳에서 ‘섬말(섬마을) 시편’ 연작을 쓰고 있다. 예술가는 죽을 때까지 자기갱신을 해야 한다고 다짐하는 김 씨. 언제 어디서든, 우리와 같은 눈을 갖되 우리가 보지 못했던 것을 시인은 보여 줄 것이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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