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영 교수의 그림 읽기]동그라미 세상 속의 고독한 네모

  • 입력 2007년 2월 10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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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찮은 네 개의 작은 귀퉁이.’ 그림=제롬 뤼예·큰나 펴냄
‘하찮은 네 개의 작은 귀퉁이.’ 그림=제롬 뤼예·큰나 펴냄
모두가 동글동글한 동그라미 아이들뿐인 곳에 네 구석이 각이 진 네모 아이가 섞여서 재미있게 놀고 있습니다. 땡땡땡! 커다란 집으로 들어갈 시간입니다. 그런데 문이 동그랗게 생겨서 네모는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 네모난 아이가 동그란 아이들 속에서 따돌림받지 않고 잘 어울려서 행복해지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둥근 아이들을 네모로 고쳐야 할까요?

아니면 네모난 아이를 동그라미로 고쳐야 할까요?

그 누구도 고치지 않고 오히려 집의 문이나 세상의 한 귀퉁이를 조금 고쳐서, 우리 마음의 한 귀퉁이를 조금 고쳐서, 서로 다른 이들이 다 함께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넉넉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 가장 현명하지 않을까요?

이 이야기를 쓰고 그림을 그린 제롬 뤼예 아저씨는 프랑스 시골구석에 살면서 파리 같은 도회지에는 좀처럼 오지 않는다고 해요. 그에게 돌보아야 할 장애 아이가 있어서 이런 이야기를 썼다는 말도 있어요. 그러나 네모난 이가 어디 장애 아이뿐이겠습니까? 우리 마음속에도 동그라미와 네모가 함께 있어야 중심을 잡지요.

이건 딴 얘기지만요, 나는 외톨이 네모를 보면서 경기 양평 서후리에 외따로 살다가 며칠 전 작고한 오규원 시인을 생각합니다. 프랑스 대통령은 미국 영화배우가 세상을 떠나도 애도의 성명서를 발표하는데 우리 지도자들은 예술이 상품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데나 쓸모 있다고 여길 뿐 숫자나 등수나 돈의 액수로 따질 수 없는 우리 시와 시인에겐 관심이 없나 봐요. “나무가 몸 안으로 집어넣는 그림자가/아직도 한 자는 더 남은 겨울 대낮/나무의 가지는 가지만으로 환하고/잎으로 붙어있던 곤줄박이가 다시/곤줄박이로 떠난 다음/한쪽 구석에서 몸이 마른 돌 하나를 굴려/뜰은 중심을 잡고 그 위에/햇볕은 흠 없이 깔린다.” 이런 군더더기 없이 견고한 고독의 경지는 우리 모두의 정신과 모국어의 높이를 훌쩍 높여 주는 것 아닐까요? 소득만 높고 시인이 보이지 않는 나라를 상상해 보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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