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갱도 밖에 있어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설도술(89·경북 포항시) 옹과 김경봉(84·서울 강서구 방화동) 옹은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진상규명위)에 확인된 유일한 국내 거주 생존자이다.
▽본보 2006년 4월 22일자 3면·8월 7일자 11면 참조▽
이들은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를 세상에 알렸고 한국인 희생자의 추모비 건립을 위해 1991년부터 활동 중인 일본 시민단체 ‘조세이 탄광 물 비상을 역사에 새기는 모임(역사에 새기는 모임)’의 초청으로 1일부터 5일까지 현지를 방문했다. 65년 만에 지옥의 현장을 다시 찾은 것.
○모양새 갖춘 첫 추모제
두 생존자가 수몰 사고가 발생한 지 65년 만에 직접 현지를 방문한 만큼 추모행사는 그 어느 때보다 모양새를 갖추어 진행됐다.
3일 오전 11시경 설 옹과 김 옹은 역사에 새기는 모임과 조세이탄광희생자유족회 관계자들과 함께 희생자들의 위패가 있는 인근의 사이코(西光)사를 방문했다.
오후 1시부터 시작된 추모제는 100여 명의 현지 주민과 재일교포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또 처음으로 조세이 탄광의 상징인 바다 속 환기통이 보이는 바닷가 근처 시유지에서 치러졌다.
조세이탄광희생자유족회 김형수 대표는 “1992년부터 추모제를 지냈지만 그동안 우베 시가 시유지에서 제사 지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매년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약식으로 지냈다”고 말했다.
당시 조세이 탄광을 경영했던 라이손 후치노스케(賴尊淵之助)의 후손들은 여전히 인근 땅을 소유하고 있지만 역사를 새기는 모임 관계자와 유족들과는 접촉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양국 정부의 무관심
1일 설 옹과 김 옹은 조세이 탄광의 한국인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비 건립을 요구하기 위해 야마구치 현 청사와 우베시청을 항의 방문했다. 하지만 두 군데 모두 관련 부서의 책임자도 못 만났고 부서 직원으로부터 추모비 건립을 ‘검토하겠다’ ‘고려하겠다’는 형식적인 답변만 들었다.
최근에는 시 측이 탄광이 있던 자리에 새로 도로와 방파제를 만들어 탄광의 자취도 찾기 어려운 상태. 탄광의 상징이며 사실상 유일한 증거물인 바다 안의 환기통도 어민들의 철거 요구를 핑계로 시가 수용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추모행사장을 찾은 주일 히로시마 총영사관 관계자 역시 간략한 추모사만 낭독한 채 생존자나 유족 대표와는 제대로 인사와 대화도 나누지 않고 자리를 떠 참석자들의 빈축을 샀다.
김 대표는 “생존자가 직접 방문한 만큼 영사관 측과 앞으로의 활동 계획을 논의할 생각이었는데 추모제가 끝나자마자 떠났다”며 “칠순의 나이에 건강도 좋지 않은 일본 시민단체 회원들이 추위에도 끝까지 유족들과 함께한 것과 비교해 한국 영사관은 너무 무성의하다”고 비난했다.
○당시 작업일지 첫 발견
진상규명위는 최근 일본 현지의 한 역사학자의 도움으로 조세이 탄광에서 일했던 한국인 근로자들의 작업일지를 처음으로 입수했다고 밝혔다.
진상규명위 진상조사팀 허광무 팀장은 “총 1000여 명에 이르는 작업일지 중 중복 기록된 것을 제외하면 700여 명분의 작업일지를 확보했다”고 말했다. 이번에 발견된 작업일지 중에는 설 옹의 작업일지도 일부 포함돼 있는데 당시 한국인 노동자들이 얼마나 살인적인 강제노동에 시달렸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설 옹의 작업일지에 따르면 그는 8월 17일부터 9월 30일(연도 미상)까지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다.
우베=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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