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선 ‘자산 관리사’ 퇴근하면 ‘인맥 관리사’

  • 입력 2006년 11월 25일 02시 55분


코멘트
우리투자증권 프라이빗뱅커인 이경미 씨는 살사댄스 동호회와 직장 동료 모임, 친구 모임 등으로 하루하루를 바쁘게 산다. 그녀가 한 주일 동안 만난 사람을 헤아려 보니 무려 330명이나 됐다.
우리투자증권 프라이빗뱅커인 이경미 씨는 살사댄스 동호회와 직장 동료 모임, 친구 모임 등으로 하루하루를 바쁘게 산다. 그녀가 한 주일 동안 만난 사람을 헤아려 보니 무려 330명이나 됐다.
■30대 프라이빗뱅커 이경미씨의 일주일

살사 바(Salsa Bar)라는 곳을 처음 가 봤다.

100평 정도나 될까, 바닥이 나무로 된 커다란 홀에서 100여 명의 젊은이가 파트너의 손을 잡고 흥겹게 춤을 추고 있었다. 거울을 뚫어지게 노려보면서 스텝과 동작을 연습하는 춤꾼들도 눈에 들어왔다.

잠시 후 흥겨운 군무(群舞)가 펼쳐졌다. 형형색색의 옷을 차려입은 젊은이들이 ‘쿠바쿠바’라는 라인댄스(Line Dance·줄을 맞춰 단체로 추는 춤)를 췄다. 외국의 댄스 영화에서 자주 보던 장면이었다.

우리투자증권 프라이빗뱅커(PB·자산관리사) 이경미(30) 씨도 리드미컬한 몸놀림을 뽐냈다. 그는 살사동호회 ‘무풍(舞風)’ 회원이다. 무풍은 ‘춤바람’이란 뜻.

이날 살사 바 손님 가운데 절반가량은 무풍 회원이다. 이들은 매주 수요일 정기모임을 갖는다. 전체 1400명의 회원 가운데 150여 명이 ‘골수 당원’이라고.

한바탕 ‘무도회’가 끝났다. 무풍 회원들의 2차 장소인 호프집까지 따라갔다. 회원들은 맥주 몇 잔을 마시더니 또 살사 춤을 췄다. 맥주 집에서 살사 댄스라니….

무풍 회원인 강형준(30) 씨는 “우리는 댄스용 신발과 CD를 갖고 다니면서 시도 때도 없이 춤을 춘다”고 귀띔한다.

이들은 오후 8시에 만나 2시간 춤추고, 1시간 술 마시고, 오후 11시경 헤어졌다.

이 씨는 이 모임에 푹 빠져있다고 했다. 등산도, 해외여행도, 영화보기도 모두 이들과 함께한다. 그에게 동호회 활동은 인적 네트워크의 중심에 있었다.

1주일간 이 씨의 생활패턴을 추적했다. 30대 안팎의 직장인들은 어떻게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는지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이 씨는 대학을 졸업한 뒤 2001년 우리투자증권에 입사했고, 올해 4월부터 고객 자산을 관리하는 PB로 일하고 있다.

그는 1주일 내내 정신없이 사람을 만났다. 1주일 동안 이 씨가 만난 사람을 꼽아보니 약 330명.

스케줄을 한번 보자. 월요일과 수요일은 살사 동호회 강습과 정기모임에 갔다. 화요일, 목요일은 직장 선후배와 모임을 가졌고, 금요일은 친구 생일파티를 근사하게 꾸몄다.

주말엔 더 바빴다. 토요일은 하루 종일 회사 세미나에 참석해 매너교육을 받았고 일요일엔 ‘현대아이파크 입주자 체육대회’에 참석했다. 그는 내년 2월 이 아파트에 입주한다.

주중 5일 동안 점심식사 세 차례는 고객과, 두 번은 직장 동료들과 했다.

그는 일주일 동안 202통의 휴대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건 것까지 포함하면 휴대전화 통화 횟수는 400통이 넘었다. 메신저로 고객, 직장 동료와 대화한 횟수도 150회에 이른다.

PB 고객(50명), 직장 동료(40명), 동호회원을 포함한 친구와 선후배(140명), 내년 아파트 입주 예정자 커뮤니티(체육대회)에서 만난 100여 명의 새 이웃까지 일주일 동안 이들을 만나면서 이 씨가 지출한 돈은 총 31만5000원. 만만치 않은 비용이다.

이 씨는 “그래도 사람 사귀는 게 큰 재산”이라며 웃는다.

이 씨는 지속적이고 유기적인 네트워킹을 통해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주변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그도 도움을 받는다.

가령 이런 식이다.

자산관리사인 그에게 “돈을 어떻게 굴려야 하느냐”고 문의하는 친구가 많다. 이 씨는 서울 여의도에서 점심 때 즉석 모임을 제의한 뒤 다 모아놓고 1시간 동안 재테크 강의를 해 준다.

동호회 ‘무풍’에 속한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활용하기도 한다.

“우린 신발도 30∼40% 싸게 싸요. 시집가는 멤버들은 보석도 할인해서 구입하기도 하죠. 직업군이 다양하니 편리한 점이 참 많죠.”

그가 주말에 참가한 동탄신도시 현대아이파크 입주자 가을운동회도 현대인의 인맥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잘 보여 준다.

아파트 정식 입주를 앞두고 입주 예정자들이 커뮤니티를 이뤄 정기적으로 체육대회, 주말농장 참가, 공동구매, 사회봉사 등을 하는 것이다.

체육대회에서 만난 입주자협의회 홍승희(32) 부회장은 “처음 5, 6명이 인터넷 카페를 통해 시작했는데 지금은 참가자가 400명에 이른다”며 “서로 친해져 이제 주말에 안 보면 허전하다”고 말했다. 그에게 네트워킹은 커다란 삶의 재미다. 그가 만약 고립된 생활을 한다면 누리지 못할 많은 혜택도 인맥을 통해서 얻고 있다.

“만약 남자 친구가 있다면 이런 생활은 못할 거예요. 지금은 시집가는 것보다 사람 만나는 게 더 좋아요.”

■디지털 시대 인맥은 ‘가로 본능’

소와 닭과 풀이 그려진 그림 앞에 미국과 중국 어린이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선생님이 물었다. “이 가운데 관련 있는 것들을 묶어 볼래?”

미국 어린이는 소와 닭을 묶었다. 같은 동물이란 이유에서다. 중국 어린이는 소와 풀을 연결했다. 소는 풀을 먹기 때문이었다.

간단한 질문을 통해 본 동서양의 차이는 뭘까. ‘생각의 지도’의 저자 리처드 니스벳 씨는 서양인은 사물을 ‘범주’로 보지만, 동양인은 사물을 ‘관계’로 파악한다고 했다.

서양과 달리 동양의 ‘나’는 누군가의 자식이고, 한 나라의 국민이며 조직의 구성원이라는 설명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인 인맥도 서양은 수평적 대등적인 형태가 많은 반면 동양은 대체로 상하관계의 수직적 구조가 보편적이었다.

하지만 산업화, 서구화로 우리 주변에서의 인적 네트워크도 일 중심의 직연(職緣), 수평적인 관계로 빠르게 바뀌고 있다.

변화의 키워드는 ‘개인주의’와 ‘디지털’이다.

40대 이상의 혈연 지연 직연 위주 인맥은 나이와 서열을 따지는 수직적 구조다.

이에 반해 인터넷과 디지털 문화에 익숙한 20, 30대 젊은 계층은 직장 생활 이외에도 개인의 관심영역에 따라 다양한 배경(또는 연령층)의 사람들과 교류한다. 10대들은 더 자유롭다.

서울대 이재열(사회학) 교수는 “60대 이상과 젊은 세대는 마치 다른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처럼 인간관계를 맺는 방식이 서로 다르다”며 “기성세대의 수직적이고 끈끈한 인맥이 젊은 세대로 오면서 수평적이고 다양한 인맥으로 바뀌고 있다”고 분석했다.

한국인들은 배우자보다 친구를 선호하는 경향도 강하다.

성균관대 서베이리서치센터가 지난해 발표한 ‘한국종합사회조사’ 자료에 따르면 ‘우울할 때 가장 먼저 도움을 청하고 싶은 사람’으로 덴마크인과 일본인은 각각 54%, 41%가 배우자를 찾는 데 반해 한국인은 절반 가까운 48%가 친구를 먼저 꼽았다. 배우자를 찾는다는 비율은 21%에 그쳤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가족과 친척을 제외하고 인맥을 형성하면서 가깝게 지내는 사람은 사회활동의 폭과 대체로 일치했다.

20대 이하에서는 가족과 친척을 제외하고 평균 5.5명과 가깝게 지낸다고 응답했다. 직장 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30대는 그 수가 7.1명으로 늘어났고, 직장의 최정점에 있는 50대는 8.9명이라고 답했다.

그러다가 60세를 넘어서면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 4.5명으로 크게 줄었다. 직장 은퇴 및 지인들의 사망으로 인적 네트워크에 균열이 생긴 탓으로 풀이된다.

<특별취재팀>

▽경제부

김상수 기자 ssoo@donga.com

문권모 기자 mikemoon@donga.com

김선우 기자 sublime@donga.com

김상훈 기자 sanhkim@donga.com

▽사진부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