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규형 교수의 차범근 예찬

  • 입력 2006년 11월 24일 16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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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규형 명지대 교수. 이훈구 기자
강규형 명지대 교수. 이훈구 기자
내 마음 속의 스타: 영원한 백넘버 11번 차범근

초등학생인 나의 두 아들은 차범근 축구교실에서 축구를 배웠다. 나를 닮아서인지 축구를 무척 좋아하지만 역시 아비를 닮아 축구실력은 그저 그렇다. 그런데도 장래 희망을 물으면 둘 다 축구선수란다. 하긴 나도 어렸을 때 차범근 선수를 보면서 축구선수가 되고 싶다는 터무니없는 꿈을 잠시나마 꾸었으니 그 치기를 탓할 일도 아니리라.

70~80년대에도 축구 열기는 지금 못지않았다. 문제는 축구실력이 세계수준과 현격한 격차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문전처리 미숙과 체력저하에 따른 뒷심부족은 고질이었다. 이 시절 한국 축구에 불세출의 스타가 나타났다. 국민 대다수가 아직은 잘 못 먹고 헐벗던 70년대 초반에 차범근은 만 19세로 역대 최연소 국가대표가 됐다. 놀라운 스피드와 발군의 돌파력, 빼어난 슈팅, 지칠 줄 모르는 체력, 타고난 성실성, 폭발적 헤딩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나에게 그의 '백넘버 11'은 100m 11초대의 무서운 스피드를 나타내는 표식이었다.

2006 독일월드컵 취재진에 제공된 '질레트 미디어 통계책자'가 세계 각국 선수들에 대한 평가를 하면서 차두리 선수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나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아버지로부터 신체적인 장점은 물려받았지만 불행하게도 골 넣는 솜씨는 물려받지 못했다."

솔직히 차두리 선수뿐이겠는가. 우리나라 역사상 차범근 선수에 버금가는 공격수는 단 한명도 없었다. 필자는 초등학생시절부터 아시아 무대가 좁다며 종횡무진 그라운드를 휘젓는 그를 보며 열광했다. 답답한 한국축구에 구세주처럼 나타난 해결사의 모습은 그를 축구에 관해서는 뭐든지 할 수 있는 신처럼 보이게 했다. "찼다하면 차범근, 떴다하면 김재한"

그가 뛰었는데도 지는 경기가 있으면 야속했다. "에이~ 차범근도 사람이구나." 그러나 이제는 전설로 남겨진 77년 대통령배 축구대회 한국 대 말레이시아전. 1:4로 뒤지던 상황에서 종료 5분 남겨놓고 3골의 소나기 골을 넣어 무승부로 만든 그는 곧 다시 신(神)의 위치로 돌아갔다.

내가 그를 더욱 숭상하게 된 계기는 물론 서독 분데스리가에서 '차붐'이란 애칭으로 펼친 활약상이었다. 아시아무대에 자족하지 않고 당시 세계 최고 리그인 분데스리가로 가기로 한 것은 대단한 모험이었다. 많은 이들은 그 결정을 어리석다고 비웃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큰 무대에서 성공해서 대한남아의 기백을 세계에 떨치기를 기대했다. 유난히 병약했던 나는 그가 세계무대를 주름잡는 것을 보며 아마도 대리만족을 느꼈던 것 같다. 79~80시즌 명문 구단 프랑크푸르트에서 본격적으로 펼쳐진 그의 활약은 처음부터 눈부셨다. 차범근은 이후 소속 팀(아인트라하트 프랑크푸르트와 바이엘 레버쿠젠)을 둘 다 팀 역사상 처음으로 UEFA컵 챔피언으로 만들었다.

이런 쾌거를 무엇에 비유할까?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으나 박찬호가 LA 다저스와 샌디에이고 파드레스의 에이스로 결정적 역할을 해서 두 팀을 월드시리즈에서 우승시키는 것에 비견될 수 있을까? 그리고 지금은 깨진 기록이지만 분데스리가 사상 외국인 최다 골 기록(308경기 98골)을 세우며 89년 영예롭게 은퇴했다.

지금처럼 위성중계를 마음껏 보는 젊은 세대는 이해 못하겠지만 당시는 나라사정이 넉넉지 못해 그의 활약상을 녹화중계로 볼 수밖에 없었다. 서양 사람들에 대해 깊은 열등감도 존재했다. 그러나 그가 그라보스키, 횔첸바인, 페차이와 같은 당대의 대스타들과 같은 팀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뭔지 모를 뿌듯함을 느꼈다. "한국인도 세계무대에서 꿀리지 않고 경쟁할 수 있구나!" 그때 일본의 오쿠데라 라는 스타플레이어가 분데스리가에 먼저 진출해 FC쾰른에서 뛰고 있었는데, 차선수가 그와의 경쟁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하는 것에서 묘한 쾌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차선수가 큰 부상으로 선수생활이 위태로워졌을 때 우리 일처럼 걱정했다. "아…이대로 끝나서는 안 되는데." 80년 6월 그가 소속팀 프랑크푸르트의 일원으로 한국 국가대표팀과 친선경기를 했을 때 나는 만사 제치고 동대문운동장에 갔다. 마치 장원 급제해 금의환향한 삼촌을 보면서 자랑스러워하는 심정이랄까. 이 경기가 끝난 뒤 얼마 안돼 들이닥칠 집안의 우환은 상상치도 못한 채 그 경기를 보며 마냥 즐거웠다. 공교롭게도 아버지(강창성 전 보안사령관)가 집에 들어 닥친 신군부 수사관에 의해 체포된 그 우환이 일어난 순간은 '차범근의 후계자'인 최순호가 차범근의 최연소 기록을 깨는 국가대표 데뷔전을 하면서 첫 골을 성공시켰을 때였다. 그리고 그 순간 나의 평범한 청소년기는 종말을 고했다.

70~80년대 당시 한국은 아직 절대적 기준에서는 못살았지만 무섭게 성장해 나가고 세계 속으로 뻗어가던 시대였다. 차 감독이 얼마 전 한 언론에 기고한대로 그 때는 '성공'에 모든 것을 두고 '전투'처럼 살았던 시대였다. 그래서 요즘 세대가 누리는 여유는 생각지도 못하고 각박하게 살았던 시대였지만, 한편으로는 불가능한 것을 이루고 후대에 번영을 안겨준 시대이기도 했다. 이러한 시대정신과 겹쳐진 그의 이미지는 단순한 스포츠 스타의 그것이 아니라 시대를 규정짓는 하나의 아이콘이요 우상이었다.

차범근, 그는 내 마음속의 영원한 '백넘버 11번'의 영웅이다.

강규형(현대사) 명지대 교수·클래식 칼럼리스트

“지금도 내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는 차범근”

역사학자인 강규형 교수는 소문난 클래식 마니아다.

그런 그에게 '내 맘속의 별'은 당연히 클래식 스타일 것으로 짐작했다. 강 교수는 처음엔 마리아 칼라스와 군돌라 야노비츠같은 소프라노 가수에 대한 열정을 말했다. 국내 인물에서 선정해달라는 취지를 듣고 지휘자 정명훈과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를 떠올렸다. 클래식계 인물이 아니더라도 좋다고 하자 송창식과 '산울림'에 대한 열정도 말했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던 강 교수는 "지금도 내 맘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진짜 스타는 차범근"이라고 털어놨다. 의외였다. 클래식 마니아 중 축구팬이 많다는 것은 알았지만 차범근이라...

강 교수는 어릴 적부터 병약했다. '스티븐 존슨 증후군'이라는 희귀 알레르기성 질환을 포함해 여러 질병을 안고 살았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네축구시합엔 빠지지 않을 정도로 축구를 좋아했다. 그런 그에게 지칠 줄 모르고 달리는 차범근은 일종의 대리만족을 안겨주는 영웅이었다. 비록 차범근이 뛰는 독일 분데스리가의 경기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어쩌다 한번 TV에서 보여준 녹화중계는 모두 봤고, 국내 경기를 열릴 때면 거의 빠짐없이 동대문운동장을 찾았다고 한다.

"차범근 씨가 독일에서 넣은 98골이 페널티킥이나 프리킥은 하나도 없이 필드골 뿐인 거 아세요. 그만큼 스스로 뛰어다니며 골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더욱 훌륭한 선수입니다."

강 교수는 선수 차범근이 아니라 감독 차범근에 대한 평가가 인색한 것을 두고 "스타 선수 출신 중에 명감독이 된 경우가 드문데 특히 공격수 출신으로 명감독 반열에 오른 사람은 독일의 클린스만 정도"라며 "이를 감안하면 감독으로서 차 감독의 선전은 높이 평가해줄만 하다"고 말했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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