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조선은 ‘욕망의 식민지’… 고려대 학술대회

  • 입력 2006년 11월 14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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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식민지 수탈기관으로 비판받은 조선식산은행(위)과 행원들의 근무하는 모습. 이들은 경제 엘리트로 대우받으며 경제적 안정을 누렸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사진 제공 우리은행 은행사 박물관
일제강점기 식민지 수탈기관으로 비판받은 조선식산은행(위)과 행원들의 근무하는 모습. 이들은 경제 엘리트로 대우받으며 경제적 안정을 누렸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사진 제공 우리은행 은행사 박물관
일제 식민통치에 순응한 개인의 일상적 허영과 욕망을 어떻게 볼 것인가.

10, 11일 고려대 인촌기념관에서 열린 역사문제연구소 창립 20주년 기념 학술대회 ‘식민지 근대를 살다’에서 발표자들은 ‘교육’, ‘취업’이라는 테마를 통해 식민지를 배경으로 살아간 개인의 일상적 욕망이 어떻게 일제의 식민 통치와 결합해 갔는지를 추적했다.

○ 경제적 욕망 추구를 통한 협조

정병욱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원은 발표문 ‘조선식산은행원, 식민지를 살다’에서 전형적인 화이트칼라였던 조선식산은행원 11명의 기록을 통해 사회적 성공을 향한 개인의 욕망과 허영심이 식민지 경제 질서를 어떻게 지탱시켰는지 보여줬다.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1927년 조선을 발칵 뒤집었던 나석주의 조선식산은행 폭탄투척 사건 직후 당시 행원 왕창업이 남긴 기록이다. 왕창업에게 민족 독립의 중요성은 자신의 경력관리보다 중요치 않았다.

그런가 하면 일제의 무단통치가 극에 달해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인 1918년 10월 행원 신경재가 남긴 일기에는 ‘월급이 올라 크게 기쁘다…미시마(三島) 은행장을 비롯한 중역에게 감사의 염(念)을 금하기 어렵다’고 돼있다.

회고록, 사내잡지 기고문 등에 나타난 이들의 공통적인 모습은 ‘사상보다는 취직’, ‘민족보다는 월급’이다.

정 연구원은 “일반 조선인보다 나은 생활을 했던 이들은 ‘남들과 다르다’는 개인적인 허영과 만족 때문에 민족보다는 일본인 행원과의 동질적 유대감이 더 강했다”고 지적했다.

대표적인 예가 1945년 패전 직후 한국인 행원의 방관 속에 이뤄진 일본인 지도부의 자금 유용. 이는 독립 국가의 물적 토대를 취약하게 만든 요인으로 작용했다.

행원 최병일은 ‘1945년 봄 패망이 가까워오자 영자신문으로 영어 공부하는 조선인 행원들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욕망의 대상이 패전을 앞둔 일본에서 승전국 미국으로 옮겨지고 있었던 것.

○ 교육적 욕망을 통한 순응

이기훈 서울대 국사학과 강사는 ‘식민지 학교 공간의 형성과 변화’라는 제목의 발표문에서 일제강점기 보통학교 제도의 정착 과정을 통해 조선 민중들의 식민 지배 순응 현상을 분석했다.

1912년 조선인의 보통학교 취학률은 2.1%에 불과했으나 1940년에는 41.6%로 가파르게 올라갔다.

일제가 요구하는 인간형의 양성소이자 정책 홍보의 수단인 보통학교 진학률의 상승은 근대 교육을 받지 못하면 생존을 위협받을 수밖에 없는 일반 민중의 각박한 삶과 연결되어 있었다. 즉 상층보다는 적극적으로 변화에 대처해야 했던 하층의 대응방식이었다는 것.

“엇지하면 나도 학교에 다닐 수 잇슬가. 엇지하면 공부를 하게 되겟슴닛가.”

1920년대 한 소년 잡지에 실린 이 글은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 내용이다.

사회적 상승 수단인 교육에 대한 욕망은 차별받는 식민지 조선인에게 친일과 반일의 가치로 따질 수 없는 대상이었다.

이렇게 추종에 가까운 교육열은 현실에 대한 자각보다는 무비판적 황국 신민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이 씨는 해방 당시까지도 진학이 가능하지 못한 조선인 학생이 더 많았고 이는 ‘열등감’으로 작용하면서 식민통치의 계급구조가 합리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지적했다.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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