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청하는 사람들이 밤낮으로…" 17세기의 원조 한류

  • 입력 2006년 11월 6일 17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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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청하는 사람들이 밤낮으로 몰려들어 그 괴로움을 견딜 수 없지만, 그 기쁨 또한 금할 수 없다"

17세기 조선통신사의 일행으로 일본에 다녀간 한 화가의 기록이다.

원조 한류(韓流)스타라 할 수 있는 조선통신사에는 학자뿐만 아니라 다수의 예술인들도 포함됐는데 그 중 화가의 인기는 사람들이 밤낮으로 몰려들어 '괴로울'정도로 대단했다.

일본 에도(江戶)시대 유학자인 아사히 시게아키(朝日重章)가 남긴 "통신사 일행이 머무른 숙소에 찾아가 몰려든 인파속에서 소품 4매를 입수했는데 하나는 인물이 거꾸로 그려져 있었다"는 기록은 당시 조선 화가의 그림이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홍선표 이화여자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는 최근 발표한 '17·18세기 한·일 회화교류의 관계성-에도시대의 조선화 열기와 그 관련양상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통해 17세기 미술 한류에 대해 설명했다.

홍 교수는 "관료나 귀족 등 지배계급 뿐 아니라 일반 민중들까지도 조선화에 대해 '뜨거운' 반응을 보인 것은 좀처럼 그 유래를 찾기 어려운 사례"라며 "기복 신앙의 영향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1764년 조선통신사였던 갑신사행의 정사 조엄이 "조선인의 묵적을 얻어서 간직해 두면 복리(福利)가 있다고 한다"고 기록한 것처럼 조선의 그림은 기복적인 효험성이 있다고 믿어졌다.

이들이 구한 그림은 대부분 호랑이, 까치, 매 등 이른바 영모도라 불리는 그림. 홍 교수는 역관들의 기록을 토대로 "당시 일본에 없는 호랑이 등의 동물 그림이 이들에게는 신성시됐다"고 밝혔다.

이러한 영모도의 열풍을 틈타 동래와 같은 무역항에서는 무명화가들이 그림을 대량으로 수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홍 교수는 "일반 민중을 상대로 대량 유통된 그림은 대부분 하등품이어서 19세기에 이르러 조선 미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낳게 했다"고 말해 인기에 편승한 무분별한 조선화 유통의 대가가 만만치 않았음을 지적했다.

유성운기자 polari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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