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어디야? 환상 속의 소설… 현실 비꼬는 초현실 배경

  • 입력 2006년 10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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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규 씨의 장편 ‘핑퐁’에 실린 일러스트. 박 씨가 인류의 운명을 건탁구 경기가 벌어지는 상상의 공간 ‘탁구계’를 그렸다. 사진 왼쪽 부터 박민규, 한유주, 김중혁, 강영숙 씨. 동아일보 자료 사진
박민규 씨의 장편 ‘핑퐁’에 실린 일러스트. 박 씨가 인류의 운명을 건탁구 경기가 벌어지는 상상의 공간 ‘탁구계’를 그렸다. 사진 왼쪽 부터 박민규, 한유주, 김중혁, 강영숙 씨. 동아일보 자료 사진
《최근 나온 박민규(38) 씨의 장편 ‘핑퐁’에는 탁구계라는 공간이 등장한다.

맹렬하게 탁구 훈련을 해온 쥐와 새 팀, 이들에게 맞서는 인류의 영웅 라인홀트 메스너와 맬컴 X 팀의 대결이 벌어지는 곳이다.

물론 지구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황당한 공간이다.

한국 소설의 공간이 달라졌다.

격렬한 사회운동의 현장을 그린 1980년대, 개인의 지극히 사적인 공간 속 풍경을 담은 1990년대 등 한국 소설은 사람들이 발 디딘 곳을 떠나본 적이 없다. 그랬던 것이 최근 들어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인 공간으로 무대가 옮겨지고 있다.

한국 문학이 판타지적 상상력과 조우한 것이다.》

강영숙(40) 씨의 새 장편 ‘리나’도 그렇다. 이상향 P국으로 가기 위해 떠도는 소녀 리나의 이야기다. 리나는 산에서 곡괭이를 든 불한당을 만나기도 하고 ‘벙어리 소년’과 ‘퇴물 여가수 할머니들’을 만나 정을 나눈다. 그러나 소설 어디에도 시간과 공간을 뚜렷하게 설정해 놓지 않았다. 강영숙 씨는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거대한 판타지로 그린 것”이라고 설명한다.

올해 주목받은 신인 김중혁(35) 씨도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곳, 일어나지도 않는 일을 소설화하기로 유명하다. ‘비트(음악에서 말하는 바로 그 비트) 해방운동’이 벌어지는 공간이 등장하는 단편 ‘펭귄뉴스’가 대표적이다. 젊은 작가 한유주(24) 씨는 첫 소설집 ‘달로’에서 “달의 뒷면에는 아름다운 무수한 바다가 있고, 많은 시인과 소년들이 그곳에 발을 담그고 싶어 했지만…소년들은 너무 어렸으며 나이를 먹은 후에는 어느 순간 노인이 되어 있었다”는 식으로 환상적인 시공간에서 펼쳐지는 사유의 흐름을 소설화했다.

시장 반응도 좋다. 박 씨의 ‘핑퐁’은 출간 한 달 새 2만 부가 넘게 팔렸고, 김 씨의 소설집 ‘펭귄뉴스’도 신인 작가의 첫 소설집으로는 드물게 1만 부나 나갔다.

환상적인 공간이라는 낯선 흐름에 대해 전문가들은 “현실과의 연관성이 부족한 게 아니라 상상력의 확장으로 볼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평론가 이광호 씨는 “리얼리즘이 뿌리 깊은 한국 문학에서 젊은 작가들의 작품 속에 새로운 공간이 출현하는 것은 낯선 풍경”이라면서 “이런 소설들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현실을 돌아보게 만든다”고 말한다. 이 씨는 “특히 젊은 작가들이 판타지 소설이나 SF 소설 등 그간 우리 문학에서 터부시돼 왔던 하위 장르에 대해 상상력을 넓히는 쪽으로 가면서 새로운 공간이 나타나게 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평론가 김영찬 씨는 “‘핑퐁’ ‘리나’, 신인인 편혜영 씨의 소설집 ‘아오이가든’ 등에서 작가들은 민주화는 됐지만 꿈꾸던 이상이 아닌 현실, 이를 변화 불가능한 것으로 여기고, 그와는 다른 자기만의 비현실적 공간을 만든다”고 말했다. 동화처럼 보이는 무대가 실은 진부한 현실을 비추고 꼬집는 거울이라는 설명이다.

작가들의 실제 의도도 그렇다. 박민규 씨는 “아무리 봐도 인류에게는 희망이 없다는 생각에” 탁구계라는 공간을 만들었다고 밝혔으며, 강영숙 씨는 “심리적으로 안정되지 못하고 헤매는 사람들의 삶의 풍경에서 내 소설이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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