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절 하길종 감독 아들, 영화와 정신분석 통합한 저서 펴내

  • 입력 2006년 10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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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신 나이가 아버지가 세상을 뜰 때의 나이와 같다는 걸 아나요?”

하지현(39·건국대병원 신경정신과) 교수는 지난해 연수 중이던 캐나다 토론토 정신분석연구소에서 정신분석가에게 이 질문을 받기 전까지 자신이 ‘아버지가 멈춰 섰던 종점’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다. 그의 아버지는 39세에 요절한 ‘천재 영화감독’ 하길종 씨.

“그 순간 갑자기 모든 게 명료해졌어요. 왜 영화와 관련된 책을 쓸 결심을 하게 됐는지, 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유난히 상세하게 말하고 싶었는지….”

그가 25일 펴낸 책 ‘관계의 재구성’(궁리출판사)은 그렇게 마흔을 바라보며 ‘아버지를 다시 만난’ 결과물이다. 영화를 통해 내면 성장의 과제를 설명하는 것으로 아들의 세계(정신분석)와 아버지의 세계(영화)를 통합한 셈이다.

거의 중년이 될 때까지 그에게 아버지는 ‘크고 높은 벽’이었다. ‘바보들의 행진’ 등으로 ‘대가의 출현’을 예감케 했던 하 감독이 1979년 뇌중풍(뇌졸중)으로 세상을 뜰 때 소설가 최인호 씨는 “신은 미쳤다”고 절규할 정도였다. 그때 하 교수는 열두 살.

“어려서는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잘 몰랐어요. 아버지가 집에 커튼을 치고 영사기를 돌리며 필름을 잘라 편집하던 기억, 불같은 아버지가 가끔 무서웠던 기억 정도…. 되레 자라면서 아버지가 얼마나 큰 벽인지 실감하게 됐죠.”

대학(서울대 의대)에 들어간 뒤에는 ‘비운의 명사’들인 아버지와 큰이모에 대한 질문으로 많이 시달렸다. 그의 큰이모는 에세이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로 1970년대 젊은이들의 우상이었고 31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전혜린 씨다.

모든 아들들이 그렇듯 그 역시 아버지를 동경하면서도 부정하고 싶은 욕구가 강했지만 “경쟁해야 할 대상 자체가 현실에 존재하지 않아 처음부터 힘든 경기”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이제 “아버지라는 ‘높고 두껍고 단단한 벽’이 벗어나야 하는 창살이 아니라 나를 지켜주는 울타리이기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자신의 영역을 만들고 마음의 성장에 필요한 과제를 치러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육체는 노화하지만 마음은 계속 자랍니다. 다른 영역에선 존경받는 사람이 어떤 특정 부분에서만 날카롭게 각을 세우고 고집을 부린다면 그건 그 사람 안의 자라지 못한 아이 때문이지요. 성숙해지려면 자기 안의 아이가 자라나 어른이 되어 생물학적 성장과 발맞출 수 있도록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김희경 기자 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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