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엽]표절, 왜 나만 갖고 그러세요?

  • 입력 2006년 10월 21일 02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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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논문에 대해 대(大)사면법이라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교수들과 학계의 논문 표절을 이야기하다가 내린 ‘우스개 결론’이다. 관행이든 뭐든 표절 문제를 따지다 보면 자유로운 교수가 많지 않을 것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농담은 사면 시점을 언제로 하느냐로 이어지다가 서글픈 생각이 들어 곧 끝내 버렸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KBS 이사인 신태섭(민주언론시민연합 대표) 동의대 광고홍보학과 교수가 표절 의혹을 제기한 본보 보도에 대해 ‘표절 가능성’을 인정하고도 “표적 공격”이라며 반발한 이유가 있을 법했다. 표절 논문이 많을 텐데 ‘왜 나만 갖고 그러느냐’는 것이다.

김재영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가 미디어 오늘에 ‘표절과 표적 보도’라는 칼럼을 기고해 “교수 사회의 표절은 어제오늘의 일도, 특정한 분야에 국한된 현상도 아니어서 관행이라 부르는 이도 있다”며 신 교수를 옹호하고 나선 희한한 논리도 마찬가지다.

한국언론정보학회는 신 교수의 의뢰를 받아 의혹이 제기된 논문 중 2편에 대해 ‘자기 표절’ 여부를 40여 일째 조사 중이다. 김영주(경남대 정치언론학부 교수) 회장은 “표절에 둔감했던 게 사실이어서 이 기회에 자기 표절 개념 등을 정리하자는 취지로 공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그 결과를 지켜봐야겠지만, 그런들 표절 문제가 정리될까 하는 일들이 이어지고 있다. 김병준 전 교육부총리가 논문 표절 시비로 물러난 뒤 두어 달 만에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장에 임명됐다. 그도 논란이 한창일 때 ‘관행론’을 주장했다.

구관서 EBS 사장의 석박사 학위 논문 자기 표절을 둘러싼 논란도 점입가경이다. 한국교육학회는 아니라고 하고,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는 “박사 논문이 곳곳에서 석사논문을 자기 표절했다”고 한다. 구 사장을 임명하기 전 이를 조사했던 방송위원회가 고개를 못들 일이다.

여기까지는 어른들의 싸움이라고 치자. 그런데 이를 논술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설명할라치면 고민이 깊어진다. 요즘 대학가에서 리포트 작성 방식은 컴퓨터 자판에 빗대 ‘컨트롤 C(복사)’ ‘컨트롤 V(붙이기)’로 불린다. 인터넷에서 그대로 복사해 옮긴다는 것이다. 오동석 아주대 법대 교수는 월간 ‘인물과 사상’에 기고한 ‘표절, 침묵의 카르텔과 윤리의 침묵’에서 “관행을 앞세운 침묵의 카르텔이 학계를 지배하고 표절의 기준이 없어 학생들도 인터넷에 기대어 스스럼없이 남의 글을 베낀다”고 개탄했다.

이런 지경에 학생들이 “왜 나만 갖고 그러느냐”고 한다면?

세계적인 디자이너 김영세 씨가 저서 ‘이노베이터’에서 밝힌 일화가 있다. 그는 미국 일리노이대 대학원 졸업 논문으로 장애인용 에스컬레이터를 디자인해 오티스사를 찾았다. 도안을 보여 주려 하자 담당자는 “여기도 아이디어를 내므로 특허를 받기 전 뚜껑을 열지 말라”고 했다. 아이디어의 도용 가능성을 사전에 서로 차단하자는 것이다.

최근 두 교수가 역사학회에서 발간하는 ‘역사학보’에 표절 행위를 공개 사과한 경우도 있다. 저작권심의조정위원회를 거친 결과다. 원(原)저자는 “두 교수가 참고 문헌에 밝혔다고 하지만 참고 수준이 아니라 사실상 전재한 것”이라고 말했다.

두 사례는 표절을 둘러싼 사전 대책 또는 사후 대응이다. 그런데도 사전은커녕 사후에도 ‘나만 그랬느냐’를 반복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학생들에게 뭐라고 해야 할지.

허엽 문화부 차장 h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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