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오명철]젊은 날의 추억들 한갓 헛된 꿈이랴

  • 입력 2006년 10월 5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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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춘선 기차를 타고 춘천에 다녀왔다. 승용차를 이용해 춘천을 지나친 적은 몇 번 있었으나 열차 편으로 다녀 온 것은 25년 여만의 일이다. 청량리역을 떠난 기차는 곧바로 아름다운 간이역 ‘화랑대’를 지난다. 열차는 이어 1970년대 젊은이들이 신입생 환영회다 미팅이다 MT다 수양회다 해서 뻔질나게 드나들던 마석 대성리 청평 가평 강촌 등 추억의 명소를 차례로 지난다. 20대의 내 모습과 소식조차 끊긴 친구 선후배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젊고 순수했던 그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슨 생각을 하며 살고 있을까.

가평역을 지나 강원도에 접어들자 소양강이 굽이굽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소양강을 보기 위해 창가에 앉으려고 기를 썼던 일이 퍼뜩 떠올랐다. 역무원의 감시를 피해 청량리역 개찰구를 넘고 열차 창문을 통해 객차 안에 뛰어들기도 했다. 피천득 선생의 아름다운 수필 ‘인연’도 떠오른다. 춘천에 가면 선생이 사랑했던 ‘아사코(朝子)’ 같은 영양(令孃)을 우연히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 같다.

1980년대 대학생들의 마음의 고향이 광주라면 1970년대 젊은이들의 영혼의 고향은 춘천일 것이다. 가난과 억압에 지친 젊은이들은 청바지 차림으로 통기타를 메고 경춘선에 올라 ‘아침이슬’ ‘친구’ ‘선구자’ ‘등대지기’ ‘모닥불’ ‘연가’ ‘사랑해’ 등을 소리 높여 불렀다. 투쟁적이지 않고 애잔한 노래들이었다. 경춘선은 그 시대 젊은이들의 해방구였고 소양강은 그들 영혼의 젖줄이었다.

경춘선 종착역인 호반(湖畔) 도시 춘천은 그런 점에서 당시 젊은이들의 영혼의 종착역이기도 했다. 그곳의 봉의산(鳳儀山) 자락에는 기숙사가 유명한 가톨릭계 성심(聖心)여대가 있었고, 공지천이 내려다보이는 드넓은 유리창이 있는 ‘이디오피아’라는 찻집은 젊은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데이트 명소였다. 막국수로 허기를 때운 젊은이들은 소양강댐에 올라 배를 타고 청평사와 양구 등으로 가기도 했다. 청량리 가는 마지막 기차를 놓치기를 은근히 기대하던 커플들도 있었지만 정작 실행에 옮긴 이는 드물었다.

1970년대만 해도 가난이 거의 모든 젊은이를 괴롭혔고, 아르바이트를 통해 등록금과 생활비를 해결하던 대학생이 상당수였다. 해외여행이나 연수는 꿈같은 얘기였다. 서울대생들은 언제 어디서든 교복을 입고 다니고, 명문 사립대생들은 체육복과 교련복에도 배지를 달고 다녀 눈총을 받던 시절이다. 군사 독재 정권이 강요한 ‘교련’은 싫어했으나 ‘교련복’은 외출복이나 잠옷 비옷처럼 애용하곤 했다. 고교생들이 대학생 누나나 오빠와 사귀는 것을 ‘성숙의 징표’로 간주하던 시절이기도 했다. 시대적 상황을 고뇌하던 중산층 중에는 자녀 교육을 위해 미국 이민을 떠나는 이들이 많았고, 이로 인해 미국에 간 남자친구와 여자친구를 그리워하는 사춘기 고교생이 적잖았다. ‘백혈병에 걸린 여자친구’는 왜 또 그리 많았는지 모르겠다.

중고교 시절 황순원의 ‘소나기’와 알퐁스 도데의 ‘별’을 읽고 자란 1970년대의 젊은이들. 다음 세대에 비해 투쟁성과 운동성은 약하지만 감수성과 순수성은 훨씬 풍부한 세대였고, 돌이켜 볼수록 이것은 신의 커다란 축복이었다. 미당(未堂)을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었다지만 그 시대 젊은이들을 키운 것은 아마 8할이 경춘선이었을 것이다. 이번 가을 기차를 타고 춘천에 한번 다녀오는 것은 어떨까. 가난했지만 순수했고, 지성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풍요로웠던 ‘우리들의 70년대’가 삶에 지친 당신을 옛 연인같이 맞아 줄 것이다. ‘인연’의 마지막 대목처럼, ‘소양강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

오명철 편집국 부국장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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