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23년 간토대지진 발생

  • 입력 2006년 9월 1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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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마을 사람들이 동네 우물 가운데 한 곳의 물을 먹지 말라고 했다. 이유는 우물 둘레에 쳐진 벽 위에 하얀 분필로 이상한 부호가 적혀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부호가 우물에 독을 탔음을 표시하는 조선인 암호일 수 있다고 했다. 어안이 벙벙했다. 그 부호는 내가 휘갈겨 놓은 낙서였기 때문이다.”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는 자서전 ‘감독의 길’에서 이렇게 썼다.

‘조선인이 방화를 하고 폭동을 일으키려 한다’ ‘조선인이 강도 강간을 일삼는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푼다’….

걷잡을 수 없이 유언비어가 퍼졌다. 어느새 조선인은 일본 공동의 적이 되어 버렸다.

일본인들은 자경단(自警團)을 조직해 조선인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손엔 죽장, 일본검, 곤봉, 톱 등이 들려 있었다.

톱질하기, 목 베기, 산 채로 불태우기…. 인간이 상상하기 힘든 갖은 방법으로 조선인들은 일본 땅에서 그렇게 죽어나갔다.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도쿄(東京)와 요코하마(橫濱)를 중심으로 한 일본 간토(關東) 지방에서 진도 7.9의 지진이 발생했다. 일찍이 겪어본 적이 없는 대지진.

땅이 갈라지고 수도와 전기가 끊겼다. 도쿄에선 화재가 연달아 일어나며 9월 3일까지 불바다가 계속됐다. 이 대화재로 기온이 올라가 도쿄의 밤 기온이 46도까지 상승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첫 지진 이후 5일 동안 936회나 여진이 계속됐고 해안지대에선 해일 피해도 발생했다. 사망자만 9만여 명이었다.

당시 일본 경제는 불황으로 실업자가 날로 늘어났다. 일본 공산당이 창당되며 노동자 농민의 권익 투쟁도 고조되던 시기. 여기에 대지진까지 일어났으니 국가 위기 상황이었다.

흉흉해진 민심을 잡기 위해선 희생양이 필요했고 그 타깃이 바로 조선인이었다.

전국적으로 조직된 3689개의 자경단에 의해 학살된 조선인은 6000여 명으로 추산됐다.

조선인 학살 현장을 체험한 구로사와 감독은 자서전에서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도대체 인간이란 어떻게 된 존재인지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며 탄식했다.

일본은 당시 자발적으로 자경단이 조직된 것이라고 은폐하려 했지만 처음부터 군대와 경찰이 개입됐다는 증거가 나중에 학자들에 의해 속속 밝혀졌다.

김상수 기자 ss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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