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스캔들…살인…빛바랜 신문속 세상만사…‘경성기담’

  • 입력 2006년 7월 29일 03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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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추행 스캔들에 휘말렸던 교육자 박희도 씨의 곱사춤 합성사진. ‘제일선’ 1932년 7월호에 실렸다. 사진 제공 살림
성추행 스캔들에 휘말렸던 교육자 박희도 씨의 곱사춤 합성사진. ‘제일선’ 1932년 7월호에 실렸다. 사진 제공 살림
◇ 경성기담/전봉관 지음/348쪽·1만2000원·살림

“제자와 선생이 모여 앉아 키스내기 화투를 한 것이 잘한 노릇이란 말이냐? 너의 학교 교장이란 자가 …에 취해…키스하고…키스하고…에 취해….”(1934년 ‘별건곤’ 4월호에 실린 이아부의 유머소설 ‘키스내기 화투’ 중에서)

해괴한 화투치기는 소설가의 상상이 아니라 실화였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중앙보육학교 박희도 교장은 당시 여제자들과 키스내기 화투를 치다가 정조를 유린했다는 대형 성추행 스캔들에 휘말렸다.

33인 중 가장 추악하게 타락한 박희도의 친일 행적은 이후 밝혀졌지만 당시 조선을 뒤흔든 ‘여제자 정조 유린사건’을 제대로 기록한 역사책은 없다. 저자는 “인문학에서는 ‘친일’보다 ‘성추행’이 더 큰 금기였다”고 말한다.

스캔들과 살인사건만큼 개인과 사회의 속살을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것이 또 있을까. 이 책은 센세이셔널한 근대의 풍속사라 할 만하다. 국문학자로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인 저자는 ‘인문학은 사생활을 감춰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명사들의 사생활을 파헤치고 살인사건을 통해 시대의 공기를 맡게 해 준다.

일제강점기 신문과 잡지에 10여 차례 보도됐으나 역사책에서는 한 줄 이상 기록되지 않은 살인사건 4건과 스캔들 6건이 이 책에 묶였다. 사실을 추상화하는 분석 없이 쉽게 쓰여서 술술 읽힌다.

책에 실린 ‘사건’들은 일제강점기가 친일과 반일의 이분법으로 쉽게 설명될 만큼 단순하고 건조한 시기가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저자는 빚을 져 가면서까지 흥청망청했던 타락한 귀족들과 경성의 후미진 곳에 암매장되는 시신들, 미신과 무지로 목숨을 잃던 하층민과 시대를 앞서간 신여성이 동시에 존재하던 시대의 풍경을 꼼꼼하게 복원했다.

사료와 해석을 경계가 희미하게 뒤섞어 놓은 이 책의 장점은 일제강점기의 어두운 풍경이 지금 들어도 별로 낯설지 않다는, 이야기의 현재성에 있다.

1937년 사이비 종교 교주가 100여 명을 몰살한 백백교 사건은 한때 떠들썩하던 오대양 사건을 환기시킨다. “재산은 300원밖에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돈을 물 쓰듯 했던 순종의 장인 윤택영 후작은 몇 년 전 재산이 30만 원도 되지 않는다고 신고한 전직 대통령을 떠올리게 만든다.

1931년 부산에서는 일본인 주부가 자신의 불륜 현장을 목격한 조선인 하녀를 정부(情夫)를 시켜 살해했는데도 피의자들이 모두 무죄로 풀려나 영구 미제 사건이 됐다. 피해자만 있고 피의자는 없는 사건, 범죄의 사실관계조차 권력에 의해 왜곡되는 양상은 요즘도 되풀이되는 풍경이 아니던가. 이 책에 실린 이야기의 현재성은 사람살이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역시 시대를 초월한 현재성이 씁쓸하게 다가오는 대목은 1931년 스웨덴 스톡홀름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돌아온 신여성 최영숙의 비극적 생애에서다.

인도 청년을 사랑해 혼혈 사생아를 임신한 채 돌아왔고 어느 직장에서도 받아 주지 않아 콩나물 장사를 해야 했던 그녀는 27세에 요절했다. 시대를 너무 앞서갔고 이방인을 사랑했으며 혼혈아를 임신했던 그녀의 비극을 보며, 저자는 미식축구의 영웅 하인스 워드의 어머니가 “한국에 왔더라면 거지밖에 안 됐을 것”이라고 말한 일화를 떠올린다. 최영숙이 수십 년 늦게 태어났더라도 조국에서 환대받을 수 있었을까….

저자가 들춰내는 명사들의 허물 많은 사생활을 읽다 보면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 얼마나 복잡한 존재인지를 절감하게 된다. 조선의 탁월한 음악가는 병든 아내를 버려둔 채 제자와 애정의 도피행각을 벌였다. 야심가들이 위대한 이상을 위해 ‘가장 손쉽게 희생하는 것은 가정과 인격’이다. 그러나 그 ‘위대한 사랑’도 역시나 비루한 일상을 피해가진 못했다. 책을 덮을 즈음이면 ‘기담(奇談)’이 더는 기이하지 않다.

김희경 기자 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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