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기타]영화의 미래를 보여주려 만화의 틀 깼다…‘씬시티’

  • 입력 2006년 7월 29일 03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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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씬시티 1, 2/프랭크 밀러 지음·김지선 옮김/200쪽 내외·각 권 9000원·세미콜론

훅∼하는 숨부터 뱉어 내야 한다. 무방비 상태에서 복부를 강타당한 느낌. 성인 남자라면 감춰둔 일기장을 누군가 훔쳐봤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엄습할 낭패감과 비밀을 털어놓을 대상이 생겼다는 안도감이 교차하는 그런 감정이다. 이 만화는 그만큼 ‘세다’.

‘영화의 미래를 보여준 작품’이란 극찬 속에 지난해 개봉한 영화 ‘씬시티’를 본 사람들이라면 숨 멎을 일이 하나 더 있다. 영화 ‘씬시티’는 만화를 영화화한 게 아니었다. 만화 ‘씬시티’가 영화의 놀라운 장면들을 선취(先取)한 것이었다.

정말이지, 이 작품이 1991년 미국에서 출간된 뒤 미국 만화계의 살아 있는 전설이 됐다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다. 흑과 백의 강렬한 대조로 구성한 화면, 아드레날린 중독에 가까운 극단의 폭력 미학, 무미건조한 일상에 젖은 현대인의 페이소스를 콕 찌르는 내레이션, 각 에피소드의 주인공들이 상호 교직하며 파고들어 가는 시공간의 확장….

무대는 미국 서부에 존재하는 가상도시 베이신 시티. 무더운 분지에 자리 잡은 도시라는 뜻이지만 죄악의 도시라는 뜻으로 ‘베이신(basin)’의 마지막 발음(sin)만 강조해 씬시티로 불린다. 주인공들은 이 도시의 제일 밑바닥을 지키고 있는 현대문명의 낙오자이자 인생의 패배자들이다.

고대에 태어났으면 불세출의 전사였겠지만 현재는 스트립 걸의 보디가드에 불과한 마브, 가슴 속 뜨거운 열정과 재능을 무의미하게 낭비하며 살아가는 삼류사진가 드와이트, 아름다움을 감추고 법과 질서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창가의 흉기가 된 미호….

거칠고, 메마르고, 닳고 닳은 그들은 신화적 용어로 호모 사케르(homo sacer)다. 사회의 존속을 위해 희생물로 버려진 존재, 살아 있어도 죽은 것과 다름없는 존재들이다. 이들을 현실로 불러내 ‘미친 영웅’으로 만드는 것은 현대인에게서 거세된 ‘날카로운 첫 키스’와 같은 열정이다. 그 어떤 이성으로도, 그 어떤 윤리로도, 그 어떤 공포로도 길들일 수 없고 망각시킬 수 없는 120%짜리 순수 열정. 때론 단 한 번의 육체적 사랑으로, 때론 반대로 처절한 사랑의 배신으로 나타나는 그것이야말로 이들의 마른 영혼에 불꽃을 지피는 한 개비의 성냥이다.

이성과 도덕과 공포의 너머에 존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신화의 영역이다. 오래된 흑백영화를 극단적으로 모방한 이 만화의 형식 또한 신화적이다. 흑은 펜으로 그려진 공간인 반면 백은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여백이다. 흑은 우리를 무력하게 만드는 도시적 문화이고, 백은 그것의 바탕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초월하게 하는 순수한 본능이다. 이처럼 이 만화는 과거의 신화로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미래의 영화가 됐다. 19세 이상 성인용 만화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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