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이 좋아하는 시인 문태준 신작시집 ‘가재미’

  • 입력 2006년 7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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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무를 심어놓고 게을러/뿌리를 놓치고 줄기를 놓치고/가까스로 꽃을 얻었다 공중에/흰 열무꽃이 파다하다/채소밭에 꽃밭을 가꾸었느냐/사람들은 묻고 나는 망설이는데/그 문답 끝에 나비 하나가/나비가 데려온 또 하나의 나비가/흰 열무꽃잎 같은 나비 떼가/흰 열무꽃에 내려앉는 것이었다’(‘극빈’에서)

이뿐 아니다. 누워 있는 수련을 보고 ‘오오, 내가 사랑하는 이 평면의 힘!’이라고 경탄한 ‘수련’, 덤불 한 감을 앞에 두고 ‘내 가슴속 거대한 亂筆(난필)’을 떠올린 ‘덤불’…. 모두 따뜻하고 속 깊은 시다.

문태준(36·사진) 시인의 세 번째 시집 ‘가재미’(문학과지성사)가 나왔다. 기대했던 독자들이 많은 터다. 시인들이 가장 좋은 시로 뽑은 ‘가재미’, 소월시문학상 수상작 ‘그맘때에는’, 미당문학상 수상작 ‘누가 울고 간다’ 등 그를 스타로 만든 작품들이 묶인 시집이다.

이미 잘 알려진 수상작품도 좋지만, 잘 여문 다른 시편들 읽는 즐거움도 크다. 시인 스스로도 아끼는 작품으로 꼽는 ‘극빈’이 그렇다. 시인은 꽃이 피기 전에 열무를 뽑아 배를 불려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채소밭에 꽃밭을 가꾸었느냐”는 사람들의 장난스러운 물음에 제대로 답하지 못할 정도로 순한 시인. ‘쓸모 있는’ 열무를 내주고 ‘쓸모없는’ 열무꽃을 받아 가난해진 셈인데, 그 꽃마저도 나비에게 내주게 됐다.

‘가녀린 발을 딛고/3초씩 5초씩 짧게짧게 혹은/그네들에겐 보다 느슨한 시간 동안/날개를 접고 바람을 잠재우고/편편하게 앉아있는 것이었다/설핏설핏 선잠이 드는 것만 같았다/발 딛고 쉬라고 내준 무릎이/살아오는 동안 나에겐 없었다/내 열무밭은 꽃밭이지만/나는 비로소 나비에게 꽃마저 잃었다’(‘극빈’ 후반부)

극도로 가난해졌지만 놀랍게도 큰 것을 얻었다. 쉼 없이 살아온 삶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다. 시인의 눈은 열무꽃에 내려앉은 나비 한 마리에 인생을 비춘다.

또 하나의 수려한 시 ‘바닥’의 한 부분. ‘그대가 나를 받아주었듯/누군가 받아주어서 생겨나는 소리/가랑잎이 지는데/땅바닥이 받아주는 굵은 빗소리 같다/후두둑 후두둑 듣는 빗소리가/공중에 무수히 생겨난다/저 소리를 사랑한 적이 있다/그러나 다 옛일이 되었다/가을에는 공중에도 바닥이 있다’

시인의 예민한 감각은 바닥이 받아줌으로써 빗소리가 날 수 있음을 포착한다. 그것은 주변의 아주 작은 것들, 그것도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자연에 속한 작은 것들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갖고 있는지 독자들에게 일깨워준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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